'짧은 인연 긴 기다림, “그래도 아이 아빠잖아요”

중국에서 만난 남편, 알고 보니 도피 생활자
기약 없는 기다림, 모진 시집살이에 폭행까지

▲ 유선희(가명) 씨의 요청에 의해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도 때론 자칫 나태할 수 있는 삶에 긴장감을 줘 그 자체를 윤택하게 하는 순기능도 갖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고통은 깊은 상처를 남기고 비극적인 결말로 막을 내리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보곤 한다.
급속도로 국제화가 진행되고 다문화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쉬워졌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구조와 인식변화는 아직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조화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9년 한국에 건너온 유선희(30) 씨도 그런 부조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하소연할 곳 하나 없는 어려움을 홀로 어렵사리 견뎌가고 있는 중국 심양 조선족 출신 다문화인이다.
“너무 어려서인지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의 역할을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유선희 씨가 한국인 남편 최 씨를 만난 것은 지난 2006년 심양, 한국인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던 유 씨는 지인으로부터 최 씨를 소개받았고 한동안 전담 가이드로서 인연을 맺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정이 들었어요. 괜찮은 사람이다 싶어서 교제를 하게 됐죠. 이것저것 따지기 보단 그냥 보여주고 행동하는 모습 그 자체를 믿었어요”
한동안의 교제 끝에 아이를 갖게 된지 8개월이 지난 2008년 1월, 행복할 것만 같았던 유선희 씨의 삶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최 씨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한국으로 보내진 것. 유능한 사업가로만 알고 있던 최 씨는 사실 한국에서의 범죄로 중국으로 건너와 도피 생활을 하고 있던 도망자였던 것이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사실을 알고서 자책도 해봤지만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유선희 씨를 향한 최 씨의 맘이 변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최 씨는 가족들을 통해 유 씨를 한국으로 데려올 방안을 찾았고 우여곡절 끝에 유선희 씨는 돌이 갓 지난 딸을 데리고 2009년 3월 한국 땅을 밟게 됐다.
호사다마랄까! 한국에만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던 유 씨를 기다린 것은 모진 시집살이와 끝도 모를 기다림뿐이었다.
“시어머님, 이혼하고 친정에 돌아와 있던 손아래 시누이, 그리고 조카와 함께 살았죠. 외출은 시장 갈 때뿐이었고 항상 집에 갇혀서 일만 해야 했습니다. 청소기도 못 돌리게 해 청소는 항상 빗자루로 해야 했고 남편 면회를 갈 때마다 차비가 많이 든다며 구박하는 바람에 그조차 편히 가질 못했죠”
의심이 많았던 시어머니는 시장에 갈라치면 돈을 주지 않고 일일이 따라다니며 직접 계산하는 등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 유선희 씨에게 철창 없는 감옥 생활을 강요했다. 심지어 일요일 면회를 간 사이 유 씨가 사용하는 세간과 옷가지들을 전부 뒤질 정도였다.
“그래도 손주인데 평상시 과자 부스러기 하나 사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안아주고 예뻐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죠. 저도 저지만 죄 없는 우리 아이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날로 심해지는 구속과 언어폭력을 아이 하나 바라보며 묵묵히 견디던 유선희 씨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으며 급기야 시누이에게 폭행까지 당하게 된다.
“2009년 10월 이었죠. 평소에도 술을 자주 먹던 시누이가 그날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귀가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어요. 방문을 부수고 차마 하기 힘든 폭언을 하며 발로 차고 머리를 잡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한 유 씨는 며칠 뒤 마침 한국에 취업차 와 있던 친정어머님이 살고 있던 오산으로 도망치다시피 피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유 씨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증세까지 보여 한동안 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고 아직도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다.
다행이 지난 6월부터 평택시여성회관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조금씩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을 꾀하고 있는 유선희 씨는 어린 딸을 볼 때마다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
“어느 날인가 아빠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아이가 그러더군요. 이번에도 창문 조그만 곳에서 만나는 거야?…, 그 후론 아이가 상처받을 까 봐 아빠는 먼 외국으로 출장 가서 오랫동안 못 온다고 하고 혼자 면회를 가곤 했습니다”
유선희 씨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그토록 구박을 했으면서도 그 후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연락조차 안하는 시댁 식구들도 아니요, 한 달 70만 원의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어려움도 아니다. 언제 출소할지 모르는 남편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막막함이다.
“남편은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 수감됐는지, 언제 출소할 수 있는지 속 시원히 말을 안 하고 숨기기만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이를 위해 옳은 것인지…”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낯선 환경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다문화인들이 아직 곳곳에 존재한다. 제도적 보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차별 없는 눈길과 관심이다.
 

※다문화가족이란?
우리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 북한이탈주민(새터민), 외국인거주자 및 그들의 자녀들을 비차별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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