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월 10일

 

 

민전民戰, 남노당에 참여 활동했던 11명
두 단체 탈당, 수도청 통해 성명서 발표

“적화의 지하공작으로 유명하던 경기도 평택군(平澤郡) 좌익단체 간부들은 十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집단성명서를 수도청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민전과 남노당의 노선이 반민족적인 동시에 매국적인 점을 지적 반성하여 우리 평택군 유지 일동은 탈당하는 동시에 지하에서 준동하는 비양심적 분자에 대하여 용감히 투쟁하여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하략)”(동아일보, 1948년 1월 10일)

해방 직후 남북한은 혼란의 시기였다. 남한은 미군정이, 북한은 소군정이 각각 통치를 담당했다. 해방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3년의 시기를 해방공간 또는 미군정기라고 한다. 특히 남한은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극도로 혼란했다. 해방 직후 맞이한 첫 3·1절 기념식을 좌익과 우익이 각각 행사를 할 정도였다.

평택은 일제강점기 수진농민조합의 조직과 활동, 노동운동, 독서회 등 비교적 사회주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신문보도에 의하면 ‘적화의 지하공작으로 유명한’ 곳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1946년 10월에는 이른바 ‘평택테러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7년 9월에는 경찰과 남노당이 결탁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평택지역의 좌익단체 주요 간부들이 1948년 1월 10일 좌익단체 탈당 성명을 수도청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그 성명서의 핵심 요지는 민전과 남노당을 탈당한다는 것이었다. 수도청은 해방 직후,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 기관이었다.

민전民戰은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으로 1946년 2월 15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좌익과 중도파를 망라한 29개의 단체들이 결성한 통일전선체였다. 그리고 남노당南勞黨은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평택지역에서 이들 단체에 참여했던 주요 단체는 민전지부, 남노당지부, 농민조합, 노동조합,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등이었다. 당시 탈당 성명에 참여한 주요 인사는 김석봉 등 1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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