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21일

 

 

5월 21일~6월 3일, 9차례 열려
3개월간 4.5% 창씨, 공무원 동원

“창씨제도가 설치된 후 평택군 일원은 사월 말일 현재 창씨 수는 본군 세대호수 일만사천삼백십삼호에 비하여 경우 사분오모에 불과한 성적임을 군 당국은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일할로 군청 직원을 총동원시켜 창씨의 취지를 철저히 고취하려고 각동 리구장, 각 진흥회장, 유도회 역원 유림과 국민정신총동원 애국반 기타 간부 등을 청강하였다 한다. 그 일할과 강사 씨명은 다음과 같다.(후략)”(조선일보, 1940년 5월 22일)

1931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를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한다. 전시체제기가 되면서 일본인화 시키기 위해 한민족의 정신, 언어 등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일본정신,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 고유의 성姓과 이름을 일본식 성姓과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강요했다. 이를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한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시행했다. 6개월 동안 창씨를 해 신고를 하도록 했지만 3개월 동안의 신고한 호수는 7.6%에 불과했다. 조선총독부는 법의 수정, 유명인의 이용, 권력기구를 동원한 강제 등을 통해 8월까지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렸다. 그 이유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각 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하고 공·사 기관 채용에 불이익을 주고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창씨개명의 강요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평택은 창씨개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기사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 호수의 4.5%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평균인 7.6%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이처럼 창씨에 참여하는 비율이 떨어지자 평택군청은 직원을 총동원해 그 취지를 알리는 강화회를 개최했다. 강화회 일정은 5월 21일 진위소학교를 비롯해 안중소학교, 내기소학교, 현덕소학교에서, 22일은 서정소학교와 고덕소학교, 28일은 서탄소학교, 31일은 청북소학교, 6월 3일은 부용소학교에서 각각 보급강화회를 개최했다. 강사는 주로 일본인이었지만 김형철 등 한국인도 있었다. 참석 대상은 각 마을 이장, 지역 진흥회장, 유도회 역원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 애국반 간부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지역 유지였지만 일제지배정책에 협력하는 계층이었으며, 이들을 통해 창씨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창씨 개명한 비율을 80%까지 끌어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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