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0월 1일

 

삼천리사, 적합 인물 공천 요청
1032표 중 112표, 안재홍 공천

“朝鮮日報 東亞日報 社長公薦 結果發表今春 본사에서 조선 사회의 중요기관인 朝鮮日報 及 東亞日報 社長의 공천을 널리 半島人士에게 요청하였던 바, 규정대로 모집 기일까지 전부 1,032표의 多數한 투표가 海內 海外로부터 있었사 외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우리들 사회 민중의 의사를 결합 반영한 것이라고 믿고 이에 그 결과를 如左히 발표하나이다.(중략) 朝鮮日報 社長 安在鴻 112표, 申錫雨 91표, 宋鎭禹 8표(하략) (삼천리 제3권 제10호, 1931년 10월 1일)

지금이야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뿐만 아니라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도 발행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1930년대 발행된 신문으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국한문판)과 <경성일보>(영문판) 그리고 민족지로 알려져 있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몇몇 신문에 불과했다. 그렇다보니 신문을 구해 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신문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소식은 신문을 통해 확인하거나 전해들을 수 있었다.

1929년 6월 창간돼 1942년 11월까지 발행됐던 <삼천리>라는 교양 잡지는 구독자를 대상으로 앙케트를 자주 하곤 했다. 1931년 봄에 당시 국내의 양대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장을 누구로 하면 가장 적합할까’라는 응모를 받았다. 그 결과 <조선일보> 사장에 평택 출신인 안재홍이 1위로 공천을 받았다. 전체 응모자는 1032명이었으며 이중 안재홍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112표를 받았다. 2위는 신석우로 91표, 3위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가 8표를 받았다.

한편 <동아일보> 사장으로는 송진우가 164표를 받아 1위를 했고 이광수가 24표로 2위를 차지했다. 안재홍은 <동아일보> 사장으로도 7표(4위)를 받았다.

안재홍이 <조선일보> 사장으로 1위로 공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사장으로도 7표를 받았다는 것은 언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저명인사로서도 공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삼천리사에서는 이 앙케트에 공모한 구독자 중 50명을 추첨해 1년 치 무료 구독권을 증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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