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16일

 

 

 

진위군 장○○, 정선 금광에서 절도
조선은행에 1700여원에 팔려다 발각

“경기도 진위군 서면 송화리 이백구십삼번지 장○○(京畿道 振威郡 西面 松花里 張○○)은 일전에 평택(平澤) 경찰서의 손에 체포되어 절도죄로 취조를 받던 중인데, 장만진은 지난 십일월 팔일 오전 여덟시 경에 강원도 정선군 동면 화암리 최응렬(江原道 旌善郡 東面 化岩里 崔應烈)이가 경영하는 금광에서 금 칠십량 중 이천여 원어치를 훔쳐다가 조선은행에 일천칠백여 원에 팔아먹은 것이 발각 체포된 것이라더라”(동아일보, 1923년 1월 16일자)

요즘 경기가 불안하고 소비심리가 위축돼 이른바 장사가 안 된다고 한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물건도 사고, 경제도 잘 풀리고 하는데, 마치 IMF 당시처럼 서민의 삶이 팍팍해졌다. 그러다 보면 절도 등 범죄가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는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는 식민지라는 어려운 상황이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더욱이 해마다 봄이면 ‘춘궁기春窮期’ 내지 ‘보릿고개’라고 해 일반인은 그야말로 초근목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나 광산촌 등으로 배회하기도 했다.
진위군 서면 송화리(현 팽성읍 송화리)에 사는 장○○는 일자리를 찾아 1922년 10월경 강원도 정선군 동면 화암리의 최응렬이가 운영하는 금광까지 찾아가게 됐다. 정선에서 금광을 운영하는 최응렬은 지역 유지로 알려졌으며, 1928년 9월 정선수리조합을 설립해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금광은 1922년 8월 1일 채광을 허가받아 인부를 모집하던 중이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금을 채취하던 장○○는 1922년 11월 8일 보관 중이던 금 70량 중 2000여 원어치를 훔쳐서 달아났다. 이를 처분하려고 알아보던 중 원래 가격보다 적은 1700여 원에 조선은행에 팔아 넘겼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돼 1923년 1월경 평택경찰서에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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