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군 원균 장군

임진왜란의 영웅·구국의 명장 원균 장군,
칠천량해전의 마지막 전투 명령은 일심순국 一心殉國 이었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구국의 인물을 비롯해 그 시대의 소명을 지나치지 않고 온몸으로 발산한 인물들의 고장이 바로 평택이다.
평택의 역사인물들은 학문으로 정치로 무예로 기예로 자신의 능력과 사명을 다해왔다.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삼학사 홍익한과 오달제, 임진왜란의 명장 원균, 신민족주의를 주창한 안재홍, 국악 교육 현대화에 앞장선 지영희 등 평택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대의 중심으로 살아온 선현들의 터전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이번호부터 연중기획으로 ‘시대를 이끈 평택의 역사인물’을 연재해 평택에서 태어났거나 적을 둔 역사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계 세대들에게 우리고장 평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적 자긍심을 심어 주고자 한다. -편집자-

임진왜란의 영웅, 구국의 명장 원균 장군은 원주 원씨의 6백년 세거지 평택시 도일동에서 1540년 중종 35년 경상좌병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셌으며 무관으로의 자질이 뛰어나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 했다.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로 있을 때 북쪽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공이 커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별 진급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 부락을 격파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왜적의 침입이 예상되자 선조 임금은 육군의 장수에서 경상도 우수영의 수군절도사로 발령을 내 적의 침입에 따른 피해를 막도록 대비시켰다. 부임한 지 3개월 뒤인 그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전쟁 시작부터 일방적인 패주(敗走)의 연속이었으며 각 도에 설치하였던 중간 규모의 군사 진영 거진(巨鎭)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하여 도읍은 텅 빈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는 수사 박홍(朴泓)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여 싸워 보지도 못하고 완전 궤멸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즉시 척후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면서, 경상남도 해역을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며 고군분투했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하여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 하였는데 이때는 한양이 왜적들에게 함락 되었을 때였다. 이때 원균 장군은 특별한 방법으로 매번 적을 쳐부쉈는데 이 방법은 ‘당파’라 하여 우리 군함으로 적선에 돌진하여 적의 배 측면을 깨 버리는 것으로써, 당시 왜적의 배는 재질이 약한 삼나무이고, 아군의 배는 견고한 소나무로 만들어져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원릉군 원균 장군
28세의 나이로 무과에 응시, 을과 2위 급제
조산만호로 북쪽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공헌
선조 25년 경상도 우수영 수군절도사로 발령
임진왜란 첫 전투 옥포해전, 왜선 26척 격파
열세 차례 전투 승리, 칠천량해전에서 순국
1604년 선조 37년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

이 작전은 적의 조총과 활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라 보통의 용맹과 담력으로는 힘든 것이었지만 원래 용맹스러운 원균 장군은 자신이 먼저 과감히 적진에 나갔으니, 임진란 초기 적병을 1개월간 전라도 해역에 진출 못하도록 한 것은 군사의 수에서 열세였던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용맹으로 막은 것이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전쟁에서의 용맹함은 원균 장군을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긴 성과를 조정에 알리는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불화가 발생했고,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경상·전라·충청을 관할하는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1594년 12월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출되었고, 얼마 후에 전라좌병사로 전속됐다.
병사로 재직 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1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또한 조선 수군은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육군의 청야전술과 수군의 해로 차단전술 중 수군의 해로차단 전술을 우선시하여 우리 수군의 전투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원균 장군은 권율 장군과 합동으로 육지와 바다를 지키고 있었으나, 권율 장군은 수군이 먼저 나가 싸우라하고, 원균 장군은 부산으로 진격하는 길목의 왜적을 육군과 수군이 합동 전략으로 공격해 부산으로의 길을 열자고 주장하여 의견의 대립을 보였다.
 
권율 장군과 조정의 강요로 곧바로 부산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받고 적의 동정을 살폈는데, 조선군을 속이는 계략을 쓰고 있음을 알아내고, 조정에 공격이 적절하지 않음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하는 수 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고 계속하여 부산포로 공격하였으나 증강된 왜적의 세력에 밀려 퇴각도중 영등포에서 왜적의 배후 기습을 받았다. 이때에 해는 져서 바다 위는 어두워지고 쫓아오는 적은 바다를 덮고 있어 군사들의 마음은 매우 위급했다. 이에 원균 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 전투계획은 오직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니라”라고 했다고 한다.
적은 육지에서 내려 보고 있다가 기습했기 때문에 아군의 수군들은 제대로 전투를 치러볼 겨를도 없이 무너져,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랐으나 적병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여 적들에게 둘러싸인 원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임진왜란의 공적을 평가할 때 선조는 “적의 공격을 처음 당하였을 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던 것이요,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이 아니었으며 적을 공격함에 있어서는 원균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고 매번 선봉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서 먼저 올라갔으니 승리의 공이 이순신과 꼭 같다. 또한 이순신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여러 번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 싸울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하였으나 비변사에서는 독촉하고 도원수 권율이 잡아다 곤장을 치니 드디어 원균은 패전할 줄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진을 떠나서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하고 그 자신도 순국하였으니, 이것은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에 으뜸일 뿐 아니라 그의 지략 또한 출중한 것이었다. …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바이니라.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하고 이순신, 권율과 함께 1등 공신으로 책록하고 원릉군(原陵君)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임진왜란에서 열네 차례의 전투를 지휘하며 열세 차례 왜적을 크게 물리쳤지만 칠천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은 원릉군 원균 장군의 영혼은 사후 고향인 평택으로 돌아왔다.
 
장군의 고향 평택에는 보물 제1133호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와 경기도기념물 제57호 ‘원균 장군 묘’, 평택시향토유적 제6호 ‘원균 장군 사당’이 있으며 말 무덤인 ‘애마총’과 울음 밭 등의 문화유적으로 남아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주며 평택의 정신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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