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광장을 지나가던 오슈꼬론느라는 노인이 조그만 노끈 한 오라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소용될 듯싶으면 무엇이든지 주워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습관으로 이번에도 그 노인은 허리를 구부려 노끈 토막을 접어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순간 심한 수치심을 느낀 노인은 재빨리 노끈을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주막에서 쉬고 있는 노인에게 경찰이 다가와 경찰서로 연행했다. 수사관은 노인에게 “당신이 오늘 아침 광장에서 지갑을 주웠다면서요. 마구상을 하는 사람이 그걸 보았답니다” 하고 점잖게 신문을 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노인은 정색을 하면서 노끈 한 오라기를 내보이면서 몸수색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단 불구속으로 풀려난 노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자기를 대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 누구 한 사람 자기를 동정하거나 인정해주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심하기만 하고 천성이 어진 그 노인은 그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밤새 앓기만 했다. 날이 밝자마자 이른 새벽부터 그 노인은 온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무혐의에 대해 극구 변명을 했지만 오히려 그의 변명이 줄기차고 강렬할수록 더 얄미운 거짓말쟁이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노력이 결국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몸져눕게 된 노인은 극심한 고독과 괴로움 속에서 헛소리를 하다가 며칠 후 그만 이 세상을 하직하고야 말았다. 불쌍한 오슈꼬론느 노인의 최후 마지막 절규는 “한 오라기의 끈이었다니까요. 자 여기 있잖아요?”라는 말이었다.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한 오라기의 끈’이라는 단편을 간단하게 소개해 보았다.
우리는 이 평범한 이야기가 한낱 시골 사람들의 단순한 삶 속에서 벌어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고 가볍게 그냥 흘려보낼 수만은 없다. 우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세상일이란 처음엔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것이 때로는 걷잡기 힘들 정도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 순박한 촌부 오슈꼬론느 노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도 사실은 지극히 우연하고 사소한 한 오라기 끈에서 시발된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도 극히 사소한 오해와 몰이해로 서로의 인간관계가 악화되고 결별의 지경에까지 치닫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누군가 “오해와 이해의 차이는 셋밖에 안된다”는 익살스러운 말을 하지만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소한 문제, 야릇한 오해를 부풀리고 키워 불행한 사태로 악화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옛 말에 양반이라 할지라도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매만지면 훔치지 않아도 의심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서 남에게 오해받을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교훈이기도 하다.
연산군 때 김정구가 지은 시조 가운데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시기할 세라. 창파에 깨끗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가 있다. 이것은 타락한 임금 밑에서 기생하며 악을 자행하는 역신들 틈에 섞여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경계의 뜻이 담겨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무슨 티 하나만 있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수 있는가”하고 참새 같은 자들이 재잘거리지만 그걸 야속하다고 몰아붙이기 전 그에 앞서 그런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도록 깨끗하고 똑똑하게 처신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게 될 때 너무 조급하게 변명하면서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한 오라기의 끈’ 단편 소설에서 깨달을 수가 있었다. 성급하고 열띤 항변과 조급한 행동은 오히려 오해를 심화시키고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가 정당할지라도 변명을 앞세우려고 하면 “뭣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까 저렇게 열을 올려 변명하고 팔팔 뛰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변명하는 사람에게 혐의를 품고 또 심중을 굳히도록 촉발시키는 요인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심장이 뜯기는 고통보다 더한 것이지만 좀 더 여유를 두고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감정을 자제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지만 모든 의사 전달이 필연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데일 카네기는 “오해는 언쟁으로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아브라함 링컨은 누구보다도 오해와 비난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이를 체험한 사람답게 “오해를 받을 때 변명하지 말라. 더구나 그것이 사실무근일 때는 더욱 항변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
태풍이 스쳐 지나가면서 억센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며 흘러내린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헌금 비리 문제로 몇몇 의원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한결같이 부인을 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일 수도 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비리들의 이야기가 오해였음 하는 마음으로 기도 드리고 싶다.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그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의 마음이 아플 테니까 말이다.
“주여, 차라리 우리에게 바윗덩이와 같은 시험을 허락하시되 한 오라기 끈 같은 시험은 없게 하시옵소서. 너무도 순박하고 너무도 청순했기에 오해의 회오리에 말려 비극의 삶이 되지 않게 하옵시고 한 오라기 끈 때문에 쓰디 쓴 눈물짓는 이웃들이 없게 하옵소서”

 

 

 


深頌 안 호 원
한국심성교육개발원장
심리상담사,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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