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막 산업사회로 발 빠르게 접어들고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으로 공화당 출신 닉슨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월남전은 막바지로 치달으며 국제정세가 어수선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사시사철 셀 수 없이 황해바다를 건너오는 황사바람이 그때만 해도 3, 4월이면 한두 번 쯤 안중 쪽에서 불어와 노란 황사에 가려진 됫박산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던 정취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타지에서 평택으로 와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의 집 문간방이거나 셋방살이 신세였고 전세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도 ‘백색전화’란 이름으로 돈이 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주 다니지도 않는 시외버스에 십리 길을 걷는 일은 예사였고 비닐봉지가 나오지 않아 구멍가게에서는 물이 뚝뚝 흐르는 두부를 신문지에다 싸서 주던 때였지만 모두가 다 가난했기에 한편으로는 상대적 박탈감이 없어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미군부대를 다니는 부모를 둔 읍내 사는 학생들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지만 원곡이나 안중, 대추리 쪽에서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가운데 많은 학생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겨우 중학교만 졸업하고는 고등학교 진학도 미뤄야 했습니다. 그때  평택경찰서 소속으로 운영되고 있는 경찰 직업학교가 있었습니다.
1학년 한 반, 2학년 한 반, 3학년 한 반, 모두 세 반.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어려운 집안형편을 돕기 위해 중학교 진학 대신 직장을 택했던 성실한 학생들에게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볼 수 있게 개설된 중학교 과정이었습니다.
직업학교 입학에는 아무 제한이 없어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남녀학생들은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평택지역 학교에서 근무하는 현직 교사였습니다.
학교가 평택경찰서 울타리 안에 위치해 있었기에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매일매일 경찰서를 드나들어야 했고 그래서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잘못한 일이 있어 계속 경찰서에 갔었냐며 묻기도 했습니다.
학생은 아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나이가 찬 처녀, 총각 어른들이었는데 혹은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공장에도 나가 일을 했습니다.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고 버스가 하루에 세 번 정도 다니는 곳에 사는 학생들도 있어 차시간에 맞추느라 수업도 다 받지 못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수업은 6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가야하는 학생들은 사무실에서 상사가 퇴근을 하기도 전에 먼저 일을 접고 나와야 했지만 모두가 다 한 가족처럼 격려하고 응원해주던 따듯한 시절이었습니다.
중학교 교육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고입(高入)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직업학교 학생들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며 싸인 피로도 잊은 채 부지런히 공부했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자원봉사로 매일 저녁 번갈아가며 학교에 나와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그 선생님들에게 학생들은 일 년에 꼭 한 번, 추석 때 3Kg짜리 삼양설탕을 하나씩 선생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작지만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들은 그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소풍도 갔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다 직장이 있어 천생 사무실이 쉬는 일요일을 택해 소풍을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김밥이나 싸가지고 소풍을 가는 일반 중학교 아이들과 달리 어른이 다 된 학생들은 솥을 가지고 가서 들에다 솥을 걸고는 나무를 주워 다가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산에 오르며 서로서로 가진 꿈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수업은 하루에 3~4시간. 여름에는 선풍기도 없어 더위에 고생을 했고 겨울에는 옹기종기 난롯가에 모여 몸을 녹였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마다 학생들은 검정고시에 붙어 자신의 기쁨은 물론 선생님들 노고에 보답했습니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학생은 교실 벽에 이름을 써서 붙이고 모두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게 마련입니다. 1976년 어느 날 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회부조리’를 없앤다는 이름으로 그동안 각 지역 경찰서에서 운영되던 모든 경찰직업학교를 다 폐쇄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정규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해 경찰직업학교에서 계속되는 공부로 마음의 등불로 삼던 학생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경찰직업학교를 인수한 평택 ‘동일목재’는 1978년 당시만 해도 배 과수원이 늘어서있던 평택 비전동에 ‘평택고등기술학교’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일터에 나가 일을 해야 했기에 학교를 다닐 수 없던 직업학교 많은 학생들은 그것으로 공부가 끝이었습니다.
학교 문을 닫는 폐교식(閉校式)에서 학생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직업학교가 문을 닫으며 학생들은 모두 산지사방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 온갖 어려움을 딛고 쌓아올렸던 그 많은 꿈은 지금쯤 모두 알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작가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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