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8일

 

 

美 선전포고일 기념 위해 정한 날
평택민, 전쟁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평택읍에서는 지난 八일 대조봉대일에 각호에 애국기를 게양하고 각 애국반 별로 봉대식을 거행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당일은 특히 전선 장병의 고로를 생각하여 금주 금연 一체 주의를 철저히 실행하였다”(매일신보, 1945년 4월 11일)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대동아전쟁을 거치는 동안 당시 식민지 조선은 그야말로 비참하고 처참하게 지내야 했다. 물론 일제에 협력하는 일부는 제외였지만. 특히 대동아전쟁 즉 태평양전쟁 시기는 말 그대로 전쟁의 참화가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미쳤다. 강제동원, 징병과 징용, 위안부 등 인적 수탈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1944년 들어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과 일본 본토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조선은 비상한 상태가 됐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고, 죽음이 미화되는 그런 시국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신사참배를 하고 매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에는 일왕 칙어勅語를 봉독하고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열창했다. 일제의 전쟁 광풍은 평택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4월 8일 대대적으로 ‘대조봉대일’ 행사를 치렀다. 대조봉대일은 1941년 12월 8일 일왕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한 날로 매월 8일이었다. 원래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각종 행사에 동원했는데, 1942년 1월 8일을 기해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이라고 했다. 이 날이 되면 각 지역마다 ‘총후적성銃後赤誠’이라고 해 식민지 조선인을 동원했다.
평택에서는 1945년 1월 8일 각 집집마다 일장기를 게양하고, 마을마다 조직된 애국반에서 일왕과 전쟁의 승리를 위한 봉대식을 거행했다. 여기서 빠지지 않은 것이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를 통해 일본정신을 주입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날 특별한 것은 전쟁에 나간 병사들의 고로苦勞를 생각해 하루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금주禁酒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금연禁煙을 가졌다. 그리고 금주와 금연으로 모은 돈을 이른바 ‘국방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기부했다.
대조봉대일은 일제강점 말기 전시체제가 진행되면서 전쟁에 광분한 일제가 ‘평택민’을 전쟁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암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