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5월 29일

 

 

 

일본인 요리집 주인, 조선인 폭행
이를 말리던 조선인 순사보도 폭행


 

“지나간 이십구일 밤 십일시경에 경부선 평택역전(京釜線 平澤驛前) 요리 영업하는 옥천(玉川)의 집에 대풍파가 났다는데 그 자세한 내용을 들은 즉, 해점 주인 옥천이가 요리 먹으러온 조선 손님과 무슨 관계로 왈시왈비 하다가 그 부근에 있는 내지인 목수 삼사인을 초집하여 합력 구타하던 바, 당 경찰서 박세양(朴世陽) 순사보가 마침 횡순하던 중 이러한 광경을 보고 제지코자 하나 종시 듣지 않고 도리어 박순사를 난타하여 두부(頭部)를 파상하고 다 도망하였다는데, 목하 당서에서는 대활동을 개시하여 엄밀 수색중이라더라”(매일신보, 1917년 6월 1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내선융화(內鮮融和)’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동화정책은 동화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차별이었다. 내지인(內地人) 즉 일본인과 조선인은 절대로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이 일상화됐고,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그 차별적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1917년 5월 29일 밤 11시경,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리집에 조선인이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부선이 부설되고 평택역이 설치됨으로써 일본인은 평택역을 중심으로 생활권을 형성했다. 일본인 다마카와(玉川)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옥천(玉川)이라는 요리집을 경영했다. 이날 조선인 한 명이 늦은 저녁 음식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주인 다마카와와 시비가 붙었다. 아마도 늦은 시각이라 술도 한 잔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소에도 조선인을 멸시하던 다마카와는 일본인 목수 서너 명을 불러 이들과 함께 조선인을 마구 때렸다.

그 시각 마침 순찰 중이던 평택경찰서 조선인 순사보 박세양(朴世陽)이 요리집 옥천 앞을 지나가게 됐다. 소란스러운 옥천에 들어가 보니 조선인 한 명이 서너 명의 일본인에게 폭행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이를 말렸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오히려 행패를 말리는 박세양 순사보를 난타했다. 박세양 순사보는 결국 머리가 터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폭력을 행사한 일본인들은 모두 도망해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본인이 조선인 순사보를 두들겨 패는 행패는 흔치는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이는 식민지 아래 공권력을 무시하는 불법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우월의식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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