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29일
 

 

 

황로태·이종국 등 조선독립단 조직
독립군자금 모집문서 발송 해 검거

 

“평택경찰서 관내 각처에 지난번 내로 독립자금을 강청하는 불온문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자가 있음을 탐지하고, 평택경찰서에서는 그 서신의 소인(消印)이 경성 광화문 우편국 소인임을 알고 이래 비밀 속에 활동 중이더니, 마침내 고심으로 수색한 결과 (중략) 황로태 이종국의 두 명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고, 황로태를 단장으로 이종국을 부단장으로 열 명의 단원을 부하로 삼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경성 수송동에 우거하고 있는 황로태의 숙사에 동거하는 경성 소의상업학교 재학생의 이민중과 및 이종국으로 하여금 등사판에 불온문서를 만들어 가지고 사월 십사오일경에 그 불온문서를 우편으로 보냈으나 즉시 평택경찰서의 탐지로 체포되었음으로 제령 위반으로 이십구일 전기 열두 명을 일건 서류와 함께 수원검사국으로 보내였더라”(매일신보, 1921년 5월 2일)

3·1운동은 일제강점 이후 민족운동의 전환을 가져왔다. 일제의 무단통치로 민족운동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1910년대를 극복하고 3·1운동 이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민족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이는 3·1운동에 참여한 경험과 일제로부터 독립을 기원하는 염원이 보다 강렬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우후죽순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고,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당시 최대의 3·1운동을 전개한 바 있는 평택에서도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군자금 모집운동이 전개됐다. 바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이다. 조선독립단은 포승면 신기리의 황로태(黃魯泰)와 병남면 영정리의 이종국(李鐘國)이 조직했으며, 황로태가 단장, 이종국이 부단장을 맡아 평택 출신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황로태는 서울 수송동에서 머물면서 단원 10명을 확보했으며, 희곡리 출신 이민중과 이종국이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문서를 인쇄해 1921년 4월 14~15일경 평택지역 부호들에게 발송했다. 그렇지만 평택경찰서의 끈질긴 추적 끝에 그 조직이 발각돼 단원 12명이 피체됐다. 이들은 평택경찰서에서 일차적으로 심문을 받고 4월 29일 수원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됐다. 황로태 등 조선독립단원은 아직까지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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