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약 10여 년 전, 살 길을 찾아 중국으로 떠난 나는 지금의 중국인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웨딩드레스에 웨딩촬영까지 하며 결혼식을 했고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 그리고 예쁜 딸 아이 우리 세 식구는 행복했다.
하지만 북에 있는 가족으로 중국에만 체류할 수 없던 나의 신분 탓에 중국과 북을 오가며 지내던 2011년 7월 북한의 한 여자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서 100만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나의 뒤를 밟고 따라온 보위부에 걸려 그 돈을 뺏기고 말았다.
나는 그 연관으로 12월 6일 ‘노동단련대’ 6개월의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지옥 같은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노동단련대’라 하면 남한의 과거 삼청교육대라는 곳 보다 더한 곳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목숨이 붙어 나오기 힘든 그런 곳이다.
나는 가정의 행복과 간호사가 되려는 나의 꿈을 생각하며 힘겹게 버텼다.
6개월을 견딘 끝에 ‘노동단련대’에서 나오게 되었고 자유 없이 억압받고 가족과도 마음 편히 함께 있을 수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그 북한사회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회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2011년 12월 겨울, 집을 떠나 온성에 있는 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초, 북경 초소의 초소장에게 중국 돈 3,000위엔을 주고 두만강을 건넜고 강을 건너 중국의 훈춘 지역에 들어섰으나 마을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몸을 숨기고 산을 넘으며 넘어지고 뒹굴기도 하며 드디어 마중 나온 남편을 만나게 되어 차에 몸을 싣고 무사히 훈춘에 도착하였다.
탈북과정을 함께 겪으며 그제야 엄마가 북한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어린 딸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탈북을 하여 중국에 더 있을 수 없는 나는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행을 하여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에 도착 후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쳐 하나센터까지… 남한에 오면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을 꺼라 자만했던 나에게 모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나의 꿈과 목표를 찾아 온 한국… 사랑하는 가족과 다시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보금자리를 찾고 행복에 부푼 어느 날, 북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 탈북을 한 나로 인해 온 가족이 시골로 추방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로 갈수록 먹을 것이 없어 힘들게 살아가야 하고 번듯한 직장을 잡고 결혼을 앞두었던 동생도 파혼을 당하고 함께 추방을 당했다는 것이다. 나의 자유를 찾겠다고 떠나 남은 가족이 고통을 받는 다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걱정을 할까봐 추방당한지 몇 달이 지나도록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고 내가 행복하면 됐다고 위로하셨다.
나는 마음먹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듯 아프지만 그럴수록 앞으로 내 목표를 향해 더욱 달려갈 것이며 나의 가족이 행복하고 사랑하는 딸이 앞으로 무한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열심히 정착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계시는 가족들에게 잘 사는 나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통일을 위하여 나도 자그마한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이 글은 북한이탈주민이 평택지역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하거나 느낀 점을 본지에 보내온 것입니다. 경기남부하나센터(656-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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