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2월 26일
 

 

3~6학년 400여 명 근로반 조직
도로에 자갈 깔아, 애국열 미화

“평택군 평택읍(平澤郡 平澤邑內) 진청학원(振靑學院)에서는 지난 二十六 일 삼학년 이상으로부터 육학년까지 四백여 명의 근로반은 도로를 펴는 자갈을 깔아 통행하던 사람에게 안전보행을 도모한다는데, 시국하 애국열이 넘치는 선생님과 생도들에 총후근로보국의 열정을 일반은 칭송이 자자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40년 3월 3일)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했으며,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전시동원체제가 돼갔다. 특히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서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했다. 이와 더불어 1938년 6월 11일 학생과 여성, 농촌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보국대라는 것을 조직했다. 학교에는 학교 근로보국대, 지역에는 지역별 근로보국대, 각 단체는 각 연맹별로 근로보국대가 결성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학교 근로보국대의 경우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사설학교까지 동원의 대상이었다.
평택에서도 학교마다 근로보국대가 조직돼 동원됐다. 1940년 2월 26일에는 진위청년회가 설립 운영하는 진청학원 학생들이 ‘근로보국’이라는 명분 아래 동원됐다. 진청학원은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6년제였는데, 3학년부터 6학년까지 400여 명으로 근로보국대를 조직했다. 이들 학생을 동원해 도로에 자갈을 깔도록 했다. 요즘의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당시의 도로는 맨흙으로 되어 있었다.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는 움푹 파이는 등 훼손되는 사례가 많았다. 더욱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도로는 더 많이 훼손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1920년대만 해도 ‘구휼’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동원해 일정한 대가를 지급했다. 그렇지만 전시동원체제가 되면서 부역이라는 명분으로 주민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강제적으로 동원됐다. 통행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명백한 강제동원이었다. 이러한 동원을 일제는 ‘애국열’을 명분으로 포장하고자 했는데, 진청학원 근로보국도 ‘애국열 넘치는 선생과 학생’이라는 것으로 포장해 학생 동원을 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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