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 봉사, 신의 뜻대로 살기 위한 것”


60여년 이발사 경력 살려 봉사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 살고 싶어

 

 

 

 

“늘 반복되는 세상살이 일상이지만 마음과 생각을 통해 작은 것에도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이발소를 통해 만날 수 있으니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 대정이발소 내부 벽에 붙어있는 글 -

해남지역 1인자 멋쟁이 이발사
“젊은 시절에는 해남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이발사였어요. 해남에서 가장 큰 이발소였고 손님도 가장 많은 곳이었죠. 당시 영화배우 김진규 스타일을 완벽하게 해냈는데 이발소가 극장 앞에 있어서 지역 국회의원이나 군수, 해남에 내려온 영화배우, 연예인들이 모두 나한테 머리를 하겠다고 찾아오곤 했었죠”
집 앞마당에 세워진 3평 남짓한 허름한 컨테이너에서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하게 ‘대정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응호(77) 현덕제일교회 장로는 지난날 화려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추억에 젖는다. 황해도가 고향으로 6.25한국전쟁 당시 목포로 내려왔다가 해남에 정착했다는 김응호 장로는 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이발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형님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 팔 하나를 잃었어요. 먹고살기 힘든 때였으니까 나라도 나서서 벌어야 했죠. 그래서 당시 해남에서 제일 큰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웠는데 워낙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이발기술도 열심히 익혔어요. 덕분에 해남을 벗어날 때까지 최고 대접을 받으며 살았죠”
잘나가던 화려한 30대 초반,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해남에서 평택 안중으로 오게 됐다는 김응호 장로는 그러나 안중에 도착한 이후 삶의 희망을 잃었다고 말한다. 당시 안중을 황량한 광야였다고 표현하는 김응호 장로는 어려서부터 어울리던 친구들과 잘나가는 이발사로서의 화려한 명성을 잃은 채 그때부터 술에 의지해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 30대 중반이 되자 위에 병이 생겨 병원에서 죽음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고.

30여년 이발 봉사 ‘대정이발소’
“어려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간 적은 있지만 제 스스로 신앙생활에 매달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아버지를 따라 현덕제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제가 기술이 있다는 걸 아시고는 새마을이발소를 권유하며 서울에서 이발소에 놓을 의자 두 개를 사서 보내셨는데 그게 이발소를 시작한 계기가 됐죠”
김응호 장로는 1981년 4월,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치우고 그곳에 마을 이름을 붙인 ‘대정이발소’를 시작했다. 처음 30원을 받았던 이발요금은 이후 요금이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는 마을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인상됐고 지금은 오천 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무료로 이발을 해주는 것이 대정이발소의 원칙이다.
“동네 이발소를 운영한지 37년이나 됐으니 주민들 대부분이 이곳을 한번 씩은 다 거쳐 간 것 같아요. 내가 과수원과 벼농사도 지어야 하니까 주민들이 머리를 깎으러 왔다가도 허탕치고 가는 일이 많지만 지금도 비만 오면 그날은 하루 종일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죠”
젊은 사람들의 경우 지금은 바쁘니 며칠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으면 아연질색하며 시내로 나가기도 하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는 옛 스타일을 고집하는 어르신들은 대정이발소가 없어지면  어디 가서 머리를 깎느냐며 걱정을 늘어놓곤 한다. 덕분에 이곳은 예약제가 아니면 머리 깎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이 났고 마을에서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신의 뜻대로 사는 삶 행복해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며 떠나기 전까지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도 소중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떠났음에도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고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해요.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그때도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니까요”
김응호 장로는 작은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당시 아무 조건 없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신앙의 힘이었다며 어렵게 말을 잇는다.
“항상 주님의 뜻대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인맥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를 주변 사람들이 잘 봐주어서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 당장 이발을 못한다고 하면 나를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바쁘니까 그렇겠구나 하고 항상 이해해주거든요”
일을 하다 쉬는 시간에는 젊어서부터 유지한 실력으로 기타를 치며 휴식을 취한다는 김응호 장로, 60여년의 이발경력으로 풍류를 즐기는 멋쟁이 이발사에서 지금은 마을 주민들의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이발사로 늘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김응호 장로는 마을이 이제 곧 개발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힘이 다할 때까지는 이발소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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