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가 조선을 세운 삼봉 정도전,
그에게는 백성이 중심인 나라 민본주의民本主義 뿐이었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구국의 인물을 비롯해 그 시대의 소명을 지나치지 않고 온몸으로 발산한 인물들의 고장이 바로 평택이다. 평택의 역사인물들은 학문으로 정치로 무예로 기예로 자신의 능력과 사명을 다해왔다.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삼학사 홍익한과 오달제, 임진왜란의 명장 원균, 신민족주의를 주창한 안재홍, 국악 교육 현대화에 앞장선 지영희 등 평택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대의 중심으로 살아온 선현들의 터전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연중기획으로 ‘시대를 이끈 평택의 역사인물’을 연재해 평택에서 태어났거나 적을 둔 역사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계 세대들에게 우리고장 평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적 자긍심을 심어 주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600여 년 전 민주주의를 주창한
   시대를 앞 선 혁명가 삼봉 정도전

경북 영주 출생, 삼각산에서 호 삼봉(三峯) 따와
21살 나이로 과거급제, 친원파에 의해 나주 유배
이성계와 뜻을 같이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워
조선의 법과 제도인 통치서 《조선경국전》 편찬
도읍을 한양으로 이전, 궁궐과 4대문 이름 지어
평택에 ‘문헌사’ ‘목판’ ‘기념관’ ‘교육관‘ 위치해

 

1392년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주역인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주다. 그를 기리는 사당 문헌사(文憲祠)와 삼봉기념관 등 정도전 유적이 위치한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는 정도전이 1398년 7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李芳遠)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 정진(鄭津)과 후손들이 낙향해 600여년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탁월한 정치가로서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인 ‘민본주의(民本主義)’와 민주주의 국가의 기초인 ‘재상정치(宰相政治)’를 주창한 조선개국의 으뜸공신 삼봉 정도전의 본관은 경상북도 봉화이며, 1342년 형부상서 염의공 정운경(鄭云敬)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존오 등과 우정을 나누며 학문에 전력을 다했다.

정도전은 1362년(공민왕 11년) 21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으로 부임해 벼슬길을 시작했으나 부모상으로 사직한 후 고향 영주로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 삼봉 정도전 유적(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이후 서울 삼각산에서 학문에 정진한 정도전은 1370년 성균관 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시 박사(太常寺 博士)를 거치는 등 대학자로의 길을 걷게 된다. 정도전의 호인 삼봉(三峯)은 여묘 살이 후 학문에 정진했던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에서 따온 것으로 정도전의 출생지로 잘못 알려진 단양의 ‘도담삼봉’과는 무관하다.

1375년(우왕 1년) 원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나라와 고려가 힘을 모아 명나라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지만 정도전은 이를 거부하고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 오거나 아니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해 결국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인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정도전이 유배를 가면서 쓴 시 ‘감흥’은 그의 사고가 어떠한지 잘 드러나 있다. “예부터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이니 살기를 탐내는 것은 편안한 일이 아니다”라는 글귀에서는 정의로움을 위해 살아온 그의 정신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 삼봉 정도전 사당 문헌사

 

정도전은 나주에서의 유배생활에서 가난하고 순박한 백성들을 많이 만났으며, 부패한 관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상황을 접하면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민초가 중심인 나라인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꿈꾸었다.

1377년 2년간의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했으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정도전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계기가 된 것은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문관의 힘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정도전은 결연한 의지를 갖고 당시 왜구토벌로 이름이 높았던 이성계를 찾아 함흥으로 건너갔다. 부패한 관료로 인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정도전의 생각에 감명 받은 이성계는 정도전과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중요한 계획의 입안이나 시행 등의 일을 보좌했다.

이때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는 물론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 말의 인륜적 퇴락 때문에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나라를 구상했지만 그의 친구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를 변화시켜야 한다며 국가경영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눈치 채고 이성계와 정도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를 전기로 1392년 정도전은 뜻을 같이한 신하들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건국한다.

정도전의 머리와 이성계의 육체가 결합돼 ‘백성이 중심인 나라 조선’을 건국했으며, 정도전은 1394년 조선의 실질적 법과 제도이며 통치서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조선 500년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의 막강한 신임에 힘입어 정도전은 국가 운영 전반에 대한 기초를 다졌지만 조선 건국 6년 만인 1398년(태조 7년)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같은 ‘재상의 나라’를 세우려했던 정도전은 목숨을 잃은 후 ‘조선개국일등공신’을 비롯한 모든 지위를 빼앗겼다. 후세에 경복궁 재건을 계기로 정도전의 위업이 높이 평가돼 1865년(고종 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려 제사를 받들게 했다. 1870년(고종 7년)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했으며, 정도전의 모든 지위를 회복시키는 복훈교지(復勳敎旨)가 내려져 사후 472년 만에 빼앗겼던 명예를 되찾았다.

▲ 삼봉 정도전 선생의 문집 삼봉집(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정도전의 가장 큰 업적은 조선의 제도와 국가정책을 수립한 것으로 조선왕조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에 영향을 준 《조선경국전》을 편찬한 것이다. 또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과 궁궐 속 각 건물, 4대문의 이름도 직접 지었다.

정도전은 임금은 상징적인 존재로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모여 결정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판단해 오늘날의 민주주의인 ‘재상중심의 국가’를 주창했다. 또 조선에서는 왕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루고 있는 백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민본주의’를 실천했다.

정도전 유적지인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는 1986년 3월 5일 평택시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된 사당 ‘문헌사(文憲祠)’와 1986년 5월 7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삼봉집목판(三峯集木板)’, ‘삼봉기념관(三峯記念館)’, 아들 정진을 기리는 사당 ‘희절사(僖節祀)’, 재실 ‘민본재(民本齋)’가 있으며, 올해 5월 15일 개관한 ‘정도전교육관(鄭道傳敎育館)’이 있다. 봉화정씨문헌공종회를 주관으로 매년 봄·가을에 제향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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