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문리 다리·만근다리·군문리·뚝 너머

 
군문리 다리橋, 만근다리橋
군문리 다리란 이름은 군문리 앞을 흐르는 안성천 위에 놓여있는 다리여서 군문리 다리라 부르고 만근다리란 조선시대 한양에서 과거를 보고 낙방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충청, 호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낙방에 상심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가 천근만근이나 되어 쉬어가던 곳이었다고 해서 ‘만근’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만근다리는 지금 차가 오고가는 군문리 다리가 아니라 도로확장이 되면서 허물어버린 군문리 다리 옆에 놓여있던 예전 다리를 만근다리라고 불렀습니다.
다리가 없어지고 난 뒤에도 얼마동안 서있던 교각도 세월이 지나면서 다 철거되었습니다. 군문리 다리 아래로는 안성천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흐르지만 평택호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오래전에는 평택들이 온통 서해바닷물로 가득한 개펄이었습니다. 통복시장 앞 다리 밑에는 서해바다로 고기잡이를 다니던 배가 묶여 있었습니다.
물컹물컹한 개펄 탓에 평택에서 안중으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도 깔 수 없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기에 서해바다가 바닷물이 차오르는 만조가 되면 합정동까지 밀려들어온 바닷물에 ‘조개터’가 생겨났습니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만근다리 밑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물놀이 사고도 생겼습니다.
한여름이면 대추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러 군문리 다리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다리에 켜진 환한 가로등 불빛에는 온갖 날벌레들이 날아들어 바닥에는 등짝에 하얀 테두리가 쳐진 ‘물방게’와 온 몸이 새카만 ‘똥방게’가 바닥에 즐비했습니다. 게아재비도 날아들고 가끔 참나무 풍뎅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논두렁길을 걸어 학교로 오던 아이들이 ‘논게’를 잡아가지고 오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군문리 새 다리가 놓이고 난 뒤에도 평택에서 안정리나 대추리, 둔포로 오고가던 버스는 경부선 철로 위를 넘어 다녀야 했습니다. 읍내에서 군문리로 넘어가던 또 하나의 땡땡 거리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 큰 버스 사고가 났습니다. 한낮이라 버스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땡땡 거리를 지나던 버스가 선로위에서 갑자기 엔진이 꺼지면서 멈춰서는 바람에 달리던 기차와 충돌해서 8명이나 죽고 다치는 대참사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뒤 그제야 통복고가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뚝너머’는 언제나 도시개발의 뒷전에 밀려나 있었습니다.

군문리軍門里
왜정시대부터 군수물자가 모여드는 병참기지 역할을 하던 평택역은 해방이 되고 미군이 이 땅에 진주進駐하면서 다시 병참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뿐만이 아니라 땅도 내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뚝너머’는 늘 그 모습이었습니다. 시내에서 군문리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가 있었는데 평택역 철로위에 놓여있는 구름다리와 ‘3리’를 지나면 통복시장을 마주보고 있던 ‘땡땡 거리’였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는 함지박을 인 여인네들과 자전거를 탄 남정네들, 학교가 파해 집으로 가는 가방을 든 학생들과 자동차도 모두 차단기 앞에 서서 얼른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오고가는 횟수가 늘면서 통복시장 건너편 땡땡 거리 밑으로는 지하차도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군문리는 평택이 시작된 곳이란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원평동’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문리는 여전히 군문동이고 ‘군문리 다리’ 이름도 여전히 군문리 다리 입니다

뚝 너머
군문리에 살던 사람들은 아주 듣기 싫어하던 말이라고 하지만 ‘뚝너머’ 하면 ‘무지개 저편’ 아니면 ‘언덕너머’ 와 같이 아름다운 꿈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얼마 전 평택에 갔던 길에 마음을 먹고 ‘군문리’ 골목길을 보고 싶어 평택역 남쪽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군문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 걸어도 마음이 편하던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지붕은 다 사라지고 불빛에 눈이 부셨습니다. 눈에 익은 풍경과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군문리는 언제부턴가 별천지 낮선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향이 사라진 느낌에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돌아서서 시내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새 단장을 한 군문리 하지만 변화와 개발이 곧 행복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달 8월 28일 화요일 태풍 ‘볼라벤’으로 온 나라가  다 뒤집어지던 시각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여기 원평동 주민자치센터인데요”
갑자기 마음속에서 쿵! 하고 끝 모르게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내 가슴에 울렸습니다. 원평동에서 온 전화를 받고 가슴이 뛴 것은 바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군문리’ 탓이었습니다.
“동요 ‘노을’이 우리 군문리 다리에서 대추리들을 바라보고 만든 노래라면서요!?”
그래서 다음 달 있을 원평동 축제에 그 내용을 행사 안내장에 넣고 싶어 전화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그래서 동요 ‘노을’에 원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원조는 평택시 군문동(행정동 명칭은 원평동)이 되었습니다.
원평동 마을축제 축하드립니다.

※작가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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