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4월 24일

일곱 번째 총회에서 임원진 선거
회장 이민훤, 부회장 신순호·정우범

 

 

 

“평택곡물협회 제칠회 정기총회는 지난 이십사일 오후 한시에 동 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회장으로부터 개회사가 끝난 다음 결산보고가 있었고, 역원을 투표 선거하였는데, 회장 이민훤(會長 李敏煊) 씨는 재임되었고 역원 전부는 아래와 같이 선거하였다고 한다(하략)”(조선일보, 1939년 4월 28일)

곡물협회의 기원은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로 일본인이 중심이 돼 미곡시장을 장악해나갔으며, 미곡유통 구조를 식민지적으로 재편하기 위해 일본은 1903년 ‘인천곡물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여타 지역에서도 곡물협회가 조직됐다.

일제강점기 곡물협회는 조선의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가 중심이 돼 미가 하락, 미곡 유통을 위해 조직된 이익단체였다. 때문에 자신들의 미곡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의 피해를 줄이고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일제의 전기체제기 되면서 조선총독부가 조선미 통제를 본격화하자 지역의 곡물협회는 연합해 1934년 9월 ‘조선곡물협회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미곡 이출을 제약하는 곡물 검사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총독부의 미곡 통제와 곡물 검사 개선책을 제기했다. 그러나 1939년 이후 식량 통제가 실시되면서 연합회는 해산됐다.

평택은 일제강점기 미곡 생산지뿐만 아니라 유통지로서도 유명했다. 평택곡물협회의 설립은 언제였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1939년 4월에 7회째 정기총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아 1932년 4월에 설립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4월 24일 개최한 정기총회에서는 결산보고 등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임원진 선거였다. 회장에는 이민훤, 부회장에는 신순호와 정우범이 각각 선임됐다.

이들은 평택의 유지들이었는데, 활동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민훤은 평택금융조합 이사·평택합동운수 이사·동아일보 평택지국 고문·진청학원 원장, 신순호는 평택합동운수 이사·평택산업 이사, 정우범은 평택금융조합 이사·안중금융조합 이사·현덕면장 등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생활이 어려운 빈민구제에도 적극 참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밖에 평택곡물협회에 참여한 인물로는 이하선(李河善), 조성하(趙成河), 윤응구(尹應九), 이홍식(李洪植), 김정수(金正洙), 김사순(金思淳), 이민응(李敏膺), 방준용(方俊容) 등이 확인되고 있다.

면(面)은 지자치단체인 군(郡)의 하부 행정구역이다. 면은 조선시대에 전농관(典農官)의 지역 배치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사(社), 방(坊), 부(部), 곡(曲)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면은 5~10개의 동리가 모여 하나의 면이 형성됐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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