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월 7일

남부럽지 않게 살던 자동차 운전수
재혼한 부인, 두 남매 버리고 도망

 

“본적을 영등포에 둔 류춘록(柳春録, 46)은 십오년 전부터 자동차 운전수(自動車運轉手)가 되어 십팔년 전에 충남 직산(稷山) 사는 장인흥(張仁興, 36)과 결혼을 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여오던 중 십년이 되던 해 봄부터 장씨는 신병이 들어 삼년이나 신음을 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중략) 작년 유월에 평택까지 와서 어떤 화물자동차부에 채용이 되어 그날그날을 살아오던 중 삼개월 후에 그 회사에서는 노쇠하다고 해고를 당하게 되어 살 실이 아득하게 되자, 지난 십이월 십오일 밤에 애처 최월순은 두 남매를 그대로 두고 어디로 인지 도망을 하여 밥과 젖을 얻어먹지 못한 어린 남매는 몸에 병이 들어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우는 양은 목불인견이었으며, 그 아버지는 세상을 원망하다가 정신에 이상까지 생겨 누구든지 보면 자기 처를 찾아달라고 하며, 두 남매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양은 참아볼 수 없다고 한다”(조선일보, 1936년 1월 7일자)

1930년대는 운전기사하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운전기사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정은 파산 나고 동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평택에서 일어났다.

본적이 영등포인 유춘록은 자동차 운전수로 일하면서 직산의 장인흥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결혼한 지 10년이 되는 해부터 아내 장인흥은 신병을 얻어 3년을 병치레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1년이 지난 후 유춘록은 안성 읍내에 사는 20대 최월순과 재혼을 하고 네 살 아들과 두 살 딸을 두었다. 하루는 유춘록이 사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하다가 1934년 6월 평택의 한 화물차 운전수로 채용돼 평택에 정착하게 됐다. 그런데 46세인 유춘록은 나이가 많다고 해고를 당했다. 이후 생활고에 극심한 곤궁을 겪던 애처 최월순은 1935년 12월 15일 밤을 이용해 집을 나가 버렸다. 어린 두 남매는 밥도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자 영양실조로 병이 들어 엄마를 찾는 모습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남편 유춘록은 세상을 원망하다가 정신이상이 와서, 사람만 보면 아내를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두 남매를 데리고 아내를 찾아달라고 통곡하는 유춘록의 모습에 평택은 눈물바다 그 자체였다. 신파극을 보는 듯한 ‘애화일막哀話一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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