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29일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위해 파견
한 달 후 ‘평택독립단사건’ 발생

 

 

“지나간 이십구일 평택 장날(平澤市日)을 당하여 평택경찰서 방순사가 시중을 순행하던 중 수상한 자 한 명이 빙빙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 순사가 뒤를 쫓아다녀도 그절저절을 모르는 그 자는 각호를 기웃기웃 들여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거동이 수상함으로 유무를 물론하고 잡아가지고 본서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한 즉 바지 속에 불온문서 기타 신식 육혈포를 가진 것을 발견하고 엄중히 취조한 결과 이 사람은 경기도 여주인 조용한(趙庸漢, 二十八)이라 하며, 기타에도 연루자가 있을 모양이므로 지금 엄중히 취조 중인데, 동인은 경성에서 내려간 듯 한다더라”(매일신보, 1921년 4월 7일자)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이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민족운동의 흐름에 대전환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민족운동의 대중화였다. 일반 민중도 민족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더욱이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민족운동 단체들이 조직되고, 이를 유지운영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특히 국외의 민족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수혈이 급선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에 군자금 모금을 위한 모금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평택지역도 이 시기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한 투쟁이 전개됐다. 대표적인 것이 1921년 4월 ‘평택독립단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평택에 파견된 모금원이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1년 3월 29일 마침 장날이었다. 3·1운동 이후 경계가 강화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은 특히 민감하게 경계를 했다. 평택경찰서 소속 조선인 순사 방 모(方某)는 순찰을 하던 중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다니며 예의주시 했다. 가게를 기웃기웃 거리며 누구를 기다리는 듯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못내 이상하게 느낀 방 순사는 수상한 자를 무작정 붙잡아 평택경찰서로 연행했다. 몸수색을 한 결과 불온문서 즉 독립운동과 관련된 서류와 육혈포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수상한 자는 경기도 여주 출신 조용한(趙庸漢)이라는 28세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파견된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원이었다. 이를 계기로 평택에는 경계가 보다 강화됐는데, 한 달 정도 후 ‘평택독립단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조용한에 대한 기사가 없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조용한과 평택독립단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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