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3월 22일

유기·철품 1천여 점, 해군 무관부 납부
당시 표현 ‘불같이 타오르는 적성’ 협력


 

 


 

“격멸의 결의 더욱 굳은 전 반도는 지금 바야흐로 금속헌납의 적성에 불타고 있어 二十二 일에도 ‘트럭’ 네 대의 금속을 멀리 평택(平澤)으로부터 경성 해군 무관부에 헌납되었다. 평택군에서는 그간 금속회수에 진력하여 오던 바, 국민의 적성은 불길 같이 타올라 유기 철품 등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가보도 들고 나와 근 천점의 금속품이 회수되었는데, 이것을 격멸의 어뢰로 받치기로 되어 미스하라(瑞源世甲) 군수 이하 五명은 군민을 대표하여 금속을 네 대의 트럭에 싣고 二十二일 오후 三시 해군 무관부로 방문하고 간곡한 감사의 말과 함께 이를 헌납하여 무관부 당국을 크게 감격시켰다.”(『매일신보』 1943년 3월 23일)

1931년 만주사변 이래 형성된 전시체제기는 그야말로 통제와 광분의 시기였다. 통제는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철저한 감시였고, 광분은 전쟁에 모든 식민지 조선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제 식민정책에 협력하는 인사들은 일반 민중을 전장(戰場)으로 인식토록 하였다. 평택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때로는 적극적으로 친일대열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전쟁물자가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금속회수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속회수운동은 1941년 6월 조선총독부가 공장과 사업장에서 우선 실시했지만, 전선이 확대되고 총과 어뢰 무기에 들어가는 금속이 부족하게 되자 일반가정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초기에는 자율적이었지만 점차 지역별, 직능별, 단체별로 할당하였다. 이로 인해 강제성을 띄게 되었고, 홍보를 곁들이면서 지배체제에 협력하는 기관이나 인물들은 금속회수운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결국 공출이라는 허울로 식민지 조선인을 옭아 맸다.
평택군에서는 1943년 3월 신문에 기사화될 정도로 적극적인 금고회수운동을 전개하였다. 미스하라(瑞源) 군수를 정점으로 하여 그 분위기가 ‘불 같이 타올랐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유기(놋그릇)와 철제품을 모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제기까지 회수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열렬히(?) 모은 유기와 철제품이 트럭으로 네 대분 1천여 점에 달하였다. 미스하라 군수와 지역을 대표하는 친일 인물들은 서울에 주둔하고 해군 무관부를 찾아가 헌납하였다. 그것도 간곡한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헌납하였다. 총후전선으로 이어지는 당시 평택인들은 자발적 회수였는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빼앗겼는지, 궁금해진다. 일제 말기 우리 할머니·할아버지의 고단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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