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 25일

상궁리 주민 40명 730원 모아
평택군 주사 박준화 처음 제안

 

 

“趙秉穆 薛秉浩 崔鎭 梁柱七 各 五拾兩, 尹冠鉉 拾五兩, 沈相德 梁武煥 各 二拾五兩, 金永俊 조秉五 鄭晉容 조鍾夏 各 拾兩, 최錫 李錫奎 各 拾五兩, 申在萬 孟昌鎬 金千鎰 各 拾兩, 孟德在 拾五兩, 安台淳 二拾五兩, 李鍾義 拾五兩, 安祖淳 최雲景 리秉俊 各 拾兩, 최殷錫 拾五兩, 孟建燮 조周顯 白南成 金千尋 各 拾兩, 薛秉瓚 拾五兩, 奉淳元 二拾五兩, 최東鎭 이光文 金致京 각 十兩, 리文基 拾五兩, 尹英鉉 拾兩, 安甲淳 拾兩, 崔文彬 十五兩, 梁義煥 二拾兩, 吳致德 拾兩, 趙時夏 沈鼎燮 각 二拾五錢 合當五七百五兩”(『황성신문』 1907년 4월 25일)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는 회명을 대동광문회로 바꾸면서 나라의 부채를 갚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으로부터 반강제적으로 차관을 제공받았다. 이 차관은 1907년 1300만원에 달하였다. 그렇지만 정부는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동광문회는 특별회원 서상돈과 김광제의 제안으로 담배를 끊고 모은 돈으로 차관을 갚자는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국체보상 의연금 모금이 전개되었다. 이에 여성들도 비녀와 가락지를 팔고 반찬 등을 아껴 모든 돈을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평택지역도 국채보상 의연금 모금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택에서는 국채보상 의연금 모금이 시작되자 1907년 3월 중순경 평택군 주사 박준화가 가장 먼저 관내 군민들에게 국채보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의연금 모금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의연금을 납부하고 이름을 남긴 군민은 당시 병파면 합정리에 사는 최응구, 최광국, 유성순, 김화삼, 윤형일, 김희문 등 6명으로, 이들은 20원(圓)을 희사하였다. 이어 평택읍 내면 상궁리 주민 40명에 당시 돈으로 구화폐 당백으로 730원을 모아 납부하였다. 그런데 신문 광고에 의하면 합 ‘당57백5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금액으로 보인다. 의연금을 낸 명단을 다음과 같다.

조병목 설병호 최진 양주칠 윤관현 심상덕 양무환 김영준 조병오 정진용 조종하 최석 이석규 신재만 맹창호 김천일 맹덕재 안태순 이종의 안조순 최운경 리병준 최은석 맹건섭 조주현 백남성 김천심 설병찬 봉순원 최동진 이광문 김치경, 이문기 윤영현 안갑순 최문빈 양의환 오치덕 조시하 심정섭

이들 외에도 당시 평택지역에서는 국채보상 의연금 모금에 참여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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