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3월 15일

징병제 취지·인식 갖도록 전국 순회
평택곡물협회 주최, 500여 명 참가

 

 

 

“二千五百萬 半島人에게도 榮譽의 徵兵制 實施에 關하여 그 趣旨를 徹底히 認識코자 全鮮 坊坊曲曲을 巡廻하는 趣旨 宣傳 野談大會는 지난 十五日 午後 七時 平澤穀物協會 樓上에서 平原 支局長 司會 下에 開催되었는데, 五百餘 聽衆으로 大盛況을 이루었다 한다.”(『매일신보』 1943년 3월 19일)

야담(野談)은 ‘민간에 전해오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의미한다.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하지만,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고 있다. 그리고 만담(漫談)은 ‘재치 있는 또는 재미있는 말솜씨로 세상을 풍자하는 이야기’로 주로 세상의 풍자를 통해 청중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담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만담가가 등장하였는데,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늘날과 같이 콘텐츠가 발달하지 못한 1940년대는 만담가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만담가는 신불출(申不出)이었다. 이러한 야담과 만담을 일제는 전시체제기에 적절하게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당시 볼거리가 없었던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홍보 수단이었다.

일제는 1938년 2월 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포하면서 식민지조선에서 조선인이 일본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1943년 학도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대학생을 강제로 전쟁터로 내보냈으며, 1944년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에 동원하였다. 이처럼 징병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그 취지를 식민지 조선에 보급하고 철저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야담만담대회’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병제 실시를 축하는 공연으로 이어졌다.

조선 청년들을 일본 천황을 위한 총알받이로 끌어내기 위한 징병제 취지 보급을 ‘야담만담대회’를 1943년 3월 15일 오후 7시 평택곡물협회에서 개최하였다. 3월 20일 개최한 김포의 만담대회에서는 김백소(金白笑), 신정언(申鼎言), 이화(李和), 김봉(金峰) 등의 만담가가 활약(?)하였는데, 평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경기도 지역을 이 시기에 순회하였다면, 이들이 평택에서도 만담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볼거리가 없었던 평택에서 500여 명이 참가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그 영향이었는데, 평택에서도 지원병에 참가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을 위하기보다는 일본 천황을 위한 가슴 아픈 역사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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