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1월 25일

황폐화되는 땅 막기 위해 보계 만들어
군수·면장 등 지역 유지 한뜻으로 개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六백여 정보는 수원이 없어 매년 용수 부족으로 황폐하여 가는 바, 삼산(森山) 군수와 면장 박원용(朴元用) 씨가 종종 의논하여 당국에 八천 원 보조 신청하는 반면 지난 十一월 二十五일 당지 곡물회관 누상에서 관계 동리 지주급 관민 유지 다수 참석리에 도두리 보계를 결성하였는데, 당선 역원은 여좌하며 공사로 인하여 노임도 산포되어 위지 一석二조격으로 一반은 삼산 군수 용단에 감격하여 마지않는다 한다.(하략)”(『매일신보』 1939년 12월 3일)

도두리(棹頭里)는 안성천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부족한 곳이었다. 논농사를 짓기 어려울 정도로. 이는 물을 가두어 놓을 수 있는 보(湺)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도두리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일대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간척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물이 부족하여 있는 논마저 점차 황폐화되어 가자, 이를 어떻게 옥토로 만들까가 늘 고민이었다. 그 해결 방책은 물을 확보하기 위한 보를 쌓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보를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는 자금이 문제였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곤란한 상황에서 보를 축조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마침내 1939년 후반기 들어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일본인 군수 모리야마(森山)과 팽성면장 박원용(朴元用)이 발 벗고 나섰다. 마침내 11월 25일 곡물회관 누상에서 도두리와 관련이 있는 지주 등 관민 유지들이 ‘도두리 보계’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도두리 보를 축조하기 위한 총공사비는 1만 2천여 원이 소요되었는데, 모리야마 군수와 박원용 면장은 경기도에 8천 원을 보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공사에 참여할 수 있고, 그 대가로 노임을 받을 수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주었기 때문에 특히 모리야마 군수의 결단에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간척을 통해 농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보다 윤택한 삶을 위해.

도두리 계의 계장은 면장 박원용이 맡았으며, 간사장에는 윤응구(尹應九)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평의원으로는 이상익(李相益) 외 15명이 참여하였다. 모리야마 군수는 1938년 진위군수로 부임하여 1938년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변경하였으며, 1940년까지 재임하였다가 안성군수로 이임하였다. 박원용 팽성면장은 1915년 진위군 서기로 임용되어 부용면장, 병남면장, 평택면장을 거쳐 1934년부터 1940년까지 팽성면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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