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8월 25일

우메다 서장 소환, 공갈 협박
기자가 사상단체 만든점 지적

 

 

 

“지난 십삼일에 振威靑年同盟을 京釜線 西井里 驛前 西井里勞動靑年回關에서 창립되었다 함은 本報에 이미 報道하였거니와, 지난 二十五日 午後 九時頃에 平澤警察署에서는 돌연이 무슨 큰일을 저질은 듯이 振威靑年同盟 執行委員 南相煥君을 召喚하여다가 署長室에서 梅田 署長이 直接 전기 南某에게 對하여 어찌하여 (중략) 同日 午前 十一時 三十分頃에 돌려보냈다는데, 이와 같이 統一치 못한 平澤警察의 該擧와 署長의 沒理解한 怪態에 非難이 一般 振威社會에 沸騰한다더라.”(중외일보』 1930년 8월 29일)

3·1운동 이후 각지에는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을 선도하였다. 1920년대는 민족주의계열이 청년단체들이 일반적이었지만 1930년대 들어 사상단체 즉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보다 진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평택도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진위청년동맹이 1930년 8월 13일 조직되었다. 진위청년동맹은 진위청년회와 달리 서정리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서정리는 일찍부터 노동운동 관련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런 점에서 서정리는 당시 사회주의를 일찍 수용하였고, 보다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평택경찰서에서는 경계 1순위 지역이었다.

진위청년동맹이 결성되자, 평택경찰서는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창립할 당시만 해도 문제를 삼지 않았는데, 불과 10여 일만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일본인 우메다(梅田) 경찰서장은 중외일보 평택지국장이며 서정리노동청년회 집행위원장이면서 진위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상환을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남상환은 서정리 일대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로 일제 경찰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그렇기 남상환의 일상을 감시하였다.

남상환을 불러들인 우메다 경찰서장은 “신문 기자면 기자의 활동만 하지 불온한 사상단체인 진위청년동맹같은 것을 조직하며, 경찰에 반항의 행동뿐만 아니라 기사까지도 반항의 태도가 보인다” “이후부터는 다른 지방의 경찰은 몰라도 진위 사회단체의 집회는 일체 불허한다” “만일 이후에 또 경찰에 반동하는 행동이 보일 때에는 단호한 처분을 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택경찰서는 다른 지역 경찰과 달라서 독단적으로라도 진위청년동맹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공갈도 서슴지 않았다.

남상환은 두 시간 반 동안 우메다 서장으로부터 공갈협박을 받고 나서야 경찰서 문을 나섰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평택 사회에서는 서장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비난만 높아갔다. 요즘 말하는 ‘갑질’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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