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은 평택의 미래입니다”

타이어 사업 도전, 노력·아이디어로 성공
경기도 유일 항만발전협의회장 책임감 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생각나면 즉시 행동으로 옮겼죠. 어찌 보면 조금 무모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성취의욕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취임한 평택항발전협의회 한강희 회장의 젊은 시절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삶이 그랬듯이 가난 탓에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던 한강희 회장은 1958년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을 시도하면서 사서 고생을 시작했다.
“차비는 물론 없었죠. 당시 디젤기관차가 처음 나왔는데 고등학교라도 좋은 곳을 가고 싶어서 몰래 무임승차를 해 서울에 왔는데 시골 중학교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더라고요. 떨어지고 나서 고향에는 가지 못하고 자리를 잡은 곳이 평택이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몸이라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신문배달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한 회장은 단순한 배달보다는 주로 구독확장을 책임지는 총무역할을 맡아 영업에 대한 수완을 배워갔다. 훗날 그가 평택지역의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게 된 토대가 된 셈이다.
언제나 심부름꾼이기보다는 대장이고 싶어 했던 한강희 사장은 1973년 한국타이어 대리점을 개설해 사업가의 길로 뛰어든다. “무작정 수첩 하나만 들고 타이어를 팔러 다녔습니다. 처음 3개월간은 주변에서 미쳤다는 얘기를 듣곤 했죠. 앞뒤 안 가리고 뛰다보니 한 두 개씩 주문이 들어오더라고요”
주문받은 제품은 자신이 직접 배달도 하곤 했는데 당시만 해도 차량이 무척 귀한 시절이어서 자전거 배달이 일상적이었다. 문제는 한강희 회장이 자전거를 타 본 경험이 없다는데 있었다.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서 밤에 몰래 연습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면서 자금을 모았고 현재 사업체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을 마련했죠”
군대 생활할 때 군수물자에 대한 단속업무를 맡아 했던 한강희 회장은 일찌감치 유통에 대한 안목이 생겨났고 거기에 그의 노력이 더해져 한국타이어 평택대리점은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하는 대리점이 되었다. 일부 대리점에서는 “제발 그만 팔아라. 다른 곳 부도난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는 것. “사업이라는 것은 노력과 아이디어가 성공의 절대적 열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정보력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죠”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던 한강희 회장은 5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산업기술대학에 진학해 평생의 꿈을 이뤘다. 무엇이든지 배워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정보화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평택대학교 야간 컴퓨터 강좌를 수강할 정도로 열의를 보여 지금도 웬만한 젊은이들 뺨칠 수준의 컴퓨터 활용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대학이 주는 분위기나 흐름을 경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남들보다 일찍, 그리고 배는 더 고생을 해선지 40이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 소리를 듣던 그는 자신만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로터리클럽 활동을 시작으로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눈을 돌린 것.
평안밀레니엄선도장학재단 이사, 평택검찰청 범죄예방협의회 남부지구 회장을 거쳐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평택항발전협의회의 수장에 뽑힌 것도 그의 추진력과 결단력, 지혜를 높이 평가받은 때문이다.
“협의회는 분명히 NGO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NGO도 바뀌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다리기 보다는 세일즈를 해야죠. 평택항이 국세를 빨아들이는 빨대역할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최소한의 금액은 평택항 발전을 위해 재투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택항은 평택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유일의 ‘항발전협의회’ 수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한강희 회장에게 평택항은 가능성은 무한하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