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였던
그녀들과
우리들이 살아왔던 삶은
다르지만 같은
어떤 기억 하나를
공유한 삶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은우 이사장
평택사회경제발전소

얼마 전 방송된 ‘그녀의 꿈’을 시청하며 몹시 부끄러웠다. 미군 가족인 여성이 “그녀와 나는 다르지 않다”며 미군 ‘위안부’였던 평택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자원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역사회가 갖고 있는 편견과 위선이 떠올라 가슴 아팠다.

평택의 아픈 역사이자 우리네 삶이었던 기지촌. 그 기지촌에서 흘러나오는 달러, 물자 등으로 평택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평택에서 왔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대번 ‘기지촌’에 대해 질문을 하여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작 지역에서 살고 있던 나와 남의 일로만 여기고 외면했던 기지촌의 삶이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혼혈 아이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친구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여겼고, 미군과 어울리는 여성들을 ‘양색시’, ‘양공주’, ‘양*보’라 비아냥거리며 멸시를 하기도 하였다. 그녀들이 지금은 없어진 통복동 시장근처의 보건소로 끌려가 강제로 성병검사를 받고, 사실상 감금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았던 우리들이었다.

그러면서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스테이크 먹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 하고, 미제 물건을 귀한 선물로 여기던 사람들이 평택사람들이었다. 미군 트럭을 쫓아가며 ‘초콜릿’을 외쳤던 우리들, 미군 ‘위안부’였던 그녀들과 우리들이 살아왔던 삶은 다르지만 같은, 어떤 기억 하나를 공유한 삶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가정 폭력에 지쳐 집을 뛰쳐나온 소녀는 인신매매를 당해 기지촌으로 흘러갔고,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에 시달리던 소녀는 취업 사기를 당해 그곳으로 갔고, 누군가는 굶는 게 지쳐 몸이라도 팔아보겠다고 갔고, 누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기지촌으로 갔다.

그런 여성들을 경제성장이 절실했던 한국정부는 미군부대 주변의 특정 장소에 모으고, 명부에 등록시켜 성병을 관리하고, 위안부 자치대를 만들어 교육을 하는 등 집결지를 관리해 왔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덕분에 미군 기지촌 수입은 한때 GNP의 25%에 달했고, 클럽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한국 전체 외화 수입의 10%에 육박할 정도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기지촌 여성들을 ‘애국자’, ‘민간 외교관“이라고 부르며 격려했던 국가, 지자체, 유지들이 지금은 그녀들을 외면하고 있으며, 부끄러운 역사를 왜 끄집어 내냐며 힐난하고 있다.

평택의 기지촌에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맨 앞에서 견뎌내야 했던 여성들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평택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던 그녀들이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국가, 지역사회, 가족들에게도 외면을 받으며 홀로 쪽방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슬픈 현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 우리의 역사 문제로 바라보고 함께 기억하고 응답할 때 그들이 미군 ‘위안부’였고, 우리 국가가 ‘포주’로서 그런 일들을 조장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래야 군사주의 문화 속에서 생기는 여성들의 피해나 구조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상처가 적지 않았고 지금도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두려운 할머니들,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의 눈빛이 아니라 그녀들의 아픈 삶을 가슴으로 보듬어주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따뜻한 연대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와 같이 평택에서 살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이 차별과 아픔을 견뎌내며 생긴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내면서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나와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를 9월 12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공연한다. 스무 살 ‘영철’과 70대 ‘숙자’의 노래와 목소리를 평택사람들이 만나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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