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2월 23일

‘낙토 만주 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이민단 모집
30호, 133명 평택역에서 석별의 인사하고 출발

 

 

 

“樂土滿洲를 開拓코자 當局의 斡旋으로 振威郡에서는 自由吏民 三十戶 家族 一百三十三名을 選拔하여 間島省 安圖縣 高登廠 部落에 入植하게 되어 지난 二十三日 平澤을 出發하게 되었는데, 驛頭에서 人山人海를 이루어 彼此 잘 가서 成功하고 오시오, 잘 있소 하는 惜別의 人事로 눈물을 머금게 하였다.(寫眞은 平澤驛을 出發하는 移民團)”(『매일신보』 1938년 2월 26일)

한인 이주의 첫 무대는 만주였다. 한말 가뭄과 한해로 인해 살기가 척박해지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목숨을 걸고 만주로 갔다. 이주한인들에 의해 만주는 점차 희망(?)의 땅이 되었다. 일제강점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로 땅을 빼앗긴 한인들은 또 다시 만주로 건너가야 했다. 그렇게 만주로 갔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집단이주를 도모하였다. 일제는 원래 자국인을 만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자 조선 농민의 만주이주를 국책으로 추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선만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인의 만주이민단을 모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낙토만주(樂土滿洲)’라는 미명 아래 이민단을 모집하였다. 말 그대로 ‘낙토’라는 것을 믿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인 만주로 향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고통의 땅’이었다.

만주이민단 모집은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는데, 평택에서도 허상의 낙토인 만주로 이주하는 이민단이 구성되었다. 개개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문기사에 의하면 ‘30호, 가족 133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1938년 2월 23일 평택역에 모였다. 이민 출발역인 평택역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인산인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평택역으로 모였다. 떠나야 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의 인사는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마지막 인사였다. 떠나는 사람에게는 “잘 가서 성공하고 오시오”, 남은 사람에게는 “잘 있소”라고. 고향을 떠나 새로 정착하는 곳은 안도현(安圖縣) 고등창(高登廠)이라는 마을이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평택으로서는 드문 사진이 함께 게재되었다. 평택역을 출발하기에 앞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한겨울이라 두툼한 옷으로 무장한 모습이었지만,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과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당시 평택역의 모습을 일부이지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진자료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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