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살아가는 식물들 중에는 감아 올라가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칡, 나팔꽃, 메꽃, 새삼, 마, 박주가리 등은 오른쪽으로 감아 돕니다. 반면 등나무나 인동, 한삼덩굴 등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더덕처럼 좌우 양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식물도 있습니다. 마치 인간사회에서 좌파나 우파, 혹은 자신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있는 것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갈등(葛藤)’의 어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칡과 등나무는 동아줄 같은 센 줄기를 다른 나무에 칭칭 휘감고 올라가는데 오른쪽으로 감는 것이 주특기인 칡과 왼쪽으로 감는 것이 주특기인 등나무는 서로 반대로 감아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면 두 나무 모두 워낙 단단하고 질겨서 뒤틀리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먼저 감아 올라간 나무가 나중에 감아 올라간 나무에 의해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이처럼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 이해가 얽혀서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이것을 우리는 갈등(葛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갈등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해묵은 갈등은 워낙 질기고 단단해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리라 체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정해진 틀에서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감아 올라가는 것은 개개의 생명 안에 내재된 성향이고 생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것이니 칡이나 등나무 모두 살기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지요. 떼어내려 할수록 본능처럼 더 단단하게 감아 올라갈 테니까요.

그러나 모든 갈등에는 칡과 등나무가 감아 올라갈 수 있도록 지탱하는 원 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념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 원줄기가 크고 원대할수록 그것을 단단하게 감아 올라간 두 나무를 풀어내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풀어내려면 두 나무는 물론이고 원 줄기까지 결국엔 모두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만일 그 원줄기가 그리 크고 뿌리가 깊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충분히 그 원줄기를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원줄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서로 얽혀 도무지 풀어낼 틈이 보이지 않았던 등나무 줄기와 칡나무 줄기 사이에도 헐렁한 공간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갈등이 있을 때 아무리 자주 만나서 대화한다고 해도 그 원줄기를 내려놓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갈등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념이나 사상, 신념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것을 꼭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해결점을 모색하려 하니 도저히 풀어낼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 대화의 장을 마련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를 이념이나 사상, 신념 등을 내려놓을 준비를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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