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18일

1930년대 학생의 3할 수용 ‘열악’
증축기성회 조직, 상임위원 6명

 

 

 

“평택공립보통학교는 현재 十二학급으로는 학령 아동을 다 수용하지 못하여 매년 입학기를 당하면 어린 아동에게 시험을 보여 어린 가슴을 아프게 함을 一반은 늘 유감으로 생각하여 오던 바, 지난 十八일 一반유지의 열성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위원 三十인을 성정하였는데, 씨명은 다음과 같다.(하략)”(『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23일)

평택공립보통학교는 1913년 3월 22일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인가 당시는 충남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소는 충청남도 평택읍 읍내면 객사리였다. 설립 당시 교사는 한국인 송명한(宋明漢)과 일본인 곡목영길(谷木榮吉)이었다. 이후 한국인 교사로는 이영식(李英植), 남구현(南九鉉), 최영석(崔永錫), 임정준(任正準), 이긍래(李肯來), 임철선(林哲善), 오맹근(吳孟根), 홍희수(洪喜秀), 김장연(金莊淵), 차병호(車秉鎬), 조욱현(趙旭顯), 송영갑(宋英甲), 이강헌(李康憲)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인 교사가 훨씬 더 많았다.
평택공립보통학교는 설립 이래 초등교육을 담당하였지만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증가되면서 학교의 증설뿐만 아니라 증축에 대해서도 논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전체 학생의 3할 정도만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도 시험을 통과해야만 가능하였다.
교육상황이 이처럼 열악한 상태가 지속되자 지역 유지들은 우선 공립학교를 증축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증축기성회는 1936년 2월 18일 조직되었다. 참여인원은 위원 30명, 고문 5명 등 35명이었지만 확인 가능한 지역 유지는 불과 11명 정도였다. 상임위원으로 선임된 지역 유지는 성주한(成周漢), 안종철(安鍾喆), 이하선(李河善), 이민현(李敏炫), 신순호(申舜浩), 이종순(李鍾純) 등이었으며, 고문에는 이성렬(李成烈), 이등병오(伊藤兵吾), 삼현길(森賢吉), 서촌유태랑(西村柳太郞), 전량한(田良漢) 등이 선정되었다. 고문에는 이성렬이 한국인으로 유일하였으며,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평택공립학교 일본인 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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