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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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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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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국보급 예인藝人
수없이 배출했던
전통예인의 고장 ‘평택平澤’

 

농사와 어업, 풍년·풍어·무사안녕 등 기원과 기복의 무속음악 발달
모흥갑·이동백 등 당대 최고의 소리꾼, 평택에서 나고 만년 보내
지영희·방용현, 경기시나위 안산제와 동령제 율제篥制 만들어내




 

   
▲ 1920년대 평택시 현덕면 포구의 어촌 풍경

 


Ⅰ 기획특집 연재를 시작하며…

■ 전통예술 성지로의 부활을 꿈꾼다

36년 전 평택군 백중놀이에 참석해 평택농악 판굿과 두레놀이를 구경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 두레농악만 봐왔던 우물 안 개구리에게 그날 봤던 웃다리 평택농악은 경이롭기까지 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평택농악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언론에 종사하면서도 계속됐고 수많은 국내외 공연에 관람자로 참여하게 했다.

평택농악은 고사굿 소리와 상쇠를 비롯한 많은 치배의 기악연주, 치배와 무동의 무용, 상모잽이의 다양한 기예가 모아진 종합예술이다. 농작업 과정에서는 노동의 고단함을 여흥으로 풀어내고, 절과 관공서 걸립에서는 기부의 동력이 되며, 판굿이 펼쳐지는 마을에는 신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평택농악이었다.

평택농악에 대한 관심은 평택지역 전통예인을 찾아가는 긴 여정의 에너지가 됐다. 평택농악 윗대에 전국 5대 남사당의 하나인 ‘남사당 진위패’가 경복궁 중건 기념으로 흥선대원군 앞에서 공연해 도대방기都大房旗와 3색 어깨띠를 하사받았다는 사실은 평택의 전통예인傳統藝人 연구의 새로운 동기가 됐다.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와 부인 성금연의 활약상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양파껍질처럼 계속되는 우리 국악에 대한 지영희의 열정을 통해 평택인의 예술혼과 위대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악기 연주, 소리, 춤, 국악 교육, 지휘, 악기개량, 채보와 작곡, 영화음악, 국악관현악단 창단 등 쉼 없는 활동은 그를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성은 평택을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게 했고, 자연을 밑천으로 살아온 민초들에게는 풍년, 풍어, 무사안녕 등 기원祈願과 기복祈福의 문화를 만들어내 평택에서 자연스럽게 굿 음악이 융성하게 했다.

산과 강만 넘어서도 소리가 바뀌고 연주의 기교가 달라지듯 경기도도당굿 음악인 경기시나위는 여러 더늠(제·制)을 만들어냈다. 방용현의 동령제東嶺制, 방돌근의 남양제南陽制, 지영희의 안산제安山制는 평택사람들의 정서를 올곧이 닮아낸 예술혼의 산물이다. 평택이 경기시나위 대부분의 본류를 만들어낸 곳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택을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성지聖地’라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조선조 순조~철종 때인 19세기 전기 판소리 8대 명창으로 ‘적벽가’를 가장 잘 부른 모흥갑과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이며 ‘국창’으로 불린 이동백의 광대성은 평택농악 고사소리와 평택민요의 노동요·장례요로 이어져왔다.

최은창으로 시작해 이돌천·김용래 등 많은 농악인들이 전승해온 평택농악은 웃다리농악의 대표성을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민조의 농요, 이종구의 어업요, 박용철의 장례요는 평택의 소리이면서 경기도 서남부지역 특성을 온전히 보존한 소리로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후세에 이어져오고 있다.

아직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전통예인들에게는 송구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전통예인들을 통해 평택이 전통예인傳統藝人의 터전이었음을, 또 다시 전통예술의 성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연중기획-평택의 전통예인’을 <평택시사신문>과 평택문화원 공동기획으로 이번호부터 본지에 연재한다.

 

   
 

 

Ⅱ. 평택의 전통예술

1. 평택지역 전통예술의 생성과 발달

■ 동고서저, 풍년·풍어·무사안녕 등
   기원·기복의 문화 발달로 굿음악 흥해

한반도의 허리, 경기도의 서남부지역에 위치한 평택은 오래전부터 국보급 예인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했던 곳이다. 평택은 동고서저(東高西低) 지역으로 동쪽에서부터 중심부까지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경작했다. 서쪽으로는 바닷가에 접해있어 고기잡이를 위한 풍년, 풍어, 무사안녕 등 기원(祈願)과 기복(祈福)의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 때문에 무속음악인 굿음악이 흥했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을 배경으로 평택에서는 소리와 기악, 춤, 풍물 등 많은 예인들이 배출됐다. 모흥갑, 지영희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만한 전통 예술인들을 배출한 고장이 평택이며, 남사당과 웃다리농악, 경기도도당굿을 주도해온 전통예술의 본류로 다른 지역에까지 그 영향을 주어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데 영향을 준 고장이 바로 평택이다.

   
▲ 평택시 북부지역에 자리잡은 부락산

이처럼 소리와 기악, 전통 연희 등 다양한 전통예술 분야에서 활약해온 ‘평택의 전통예인들’은 오늘의 평택을 있게 한 장본인이며 그들을 통해 평택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모흥갑, 19세기 전기 판소리 8대 명창
   이동백, 근대 5명창 중 당대 최고 인기

진위현에서 태어난 모흥갑(1822~ 1890)은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판소리를 풍미한 명창이다. 권삼득, 송홍록,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박유전, 김제철과 함께 19세기 전기 판소리 8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 인물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하여 고음처리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에 능했다.

특히 명창을 아꼈던 헌종으로부터 동지(同知)의 벼슬을 받은 모흥갑은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를 내자 10리(4Km)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으로 ‘국창’으로까지 불린 이동백(1866~1950)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말년에 10여 년간 평택 칠원동에서 살다 작고했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는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광대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만년 평택 칠원동 인근 덕암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온다.

이동백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으로 이들 근대 5명창 중에서도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명창이 바로 이동백이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함께 타고난 천구성과 뛰어난 너름새로 20세기 전반 음악계 전체를 주도했다. 그가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판소리 중고제의 마지막 창자라는 점이다.

이동백은 1900년 고종의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렀으며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했다. 그는 ‘심청가’와 ‘적벽가’, ‘새타령’을 특히 잘 불렀다. 1902년 서울로 올라온 이후 근 40년간을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동백은 후진들을 위해 은퇴를 결심하고 이후 칠원동에서 지내며 웃다리농악을 재현하고 후학을 육성하다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밖에도 평택의 예인 가운데 소리로 이름난 인물은 평택농악의 첫 예능보유자로 작고한 최은창과 이돌천,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용래가 있는데 세 사람은 관아와 절, 다리, 집 등을 걸립할 때 기원하는 고사굿의 명인이다. 평택민요의 이민조는 농요, 작고한 이종구와 박용철은 각각 어업요와 장례요의 명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 팽성읍 석봉리 진위천과 안성천 두물머리

 

■ 지영희,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로 명성
   방용현, 경기시나위 동령제의 창시자

세계 각국의 전통음악을 말하는 데 있어 종교음악 또는 무속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무속음악은 곧 축원, 기원을 뜻하는 음악으로 농경이나 어업이 산업의 전부였을 때 풍년과 풍어,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의 수단이기도 했다. 평택은 특히 농업과 어업이 발달해 항상 기원이 필요했으며 이 때문에 무속음악인 굿음악이 왕성했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지영희의 ‘지문일가’와 방용현의 ‘방문일가’를 비롯해 많은 기악가들이 활동해왔다.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으로 악기, 소리, 춤 등에 두루 능했던 지영희(1908~1979)는 서해 바다에 접한 포승읍 내기리의 전통적 세습무(世襲巫) 집안에서 태어났다. 지영희는 예인(藝人)으로서 연주, 교육, 지휘 등 민속음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며 경기 지방의 무속 가락을 근간으로 한 그의 음악은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경기 대풍류’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영희는 평생 동안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10세 때부터 승무, 검무 등 여러 춤을 배우기 시작해 20세부터는 호적과 양금, 단소, 퉁소를 배웠다. 23세부터는 지용구에게서 해금, 풍류시나위를 전수받고, 양경원에게 피리 삼현육각과 시나위를 배웠다. 그리고 대금 시나위, 무악장단, 경기 서도 소리를 전수받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대가들에게 전수 받은 다양한 분야의 능력을 토대로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교사,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무엇보다도 지영희의 가장 큰 업적은 국악이 피아노와 국악오케스트라로 연주되고 오선보에 그려졌으며, 교실에서 아이들의 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 지영희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그의 아내 성금연(成錦鳶)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이다.

포승읍 서해 바닷가 마을에 지영희 가문의 전통음악 ‘지문일가’가 있었다면 평택 땅 동쪽 이충동에는 방용현을 중심으로 한 ‘방문일가’의 예술혼이 서려있다.

이충동 동령마을 출신으로 이 마을에서 무속의 악사로 종사하던 방용현(1868~?)은 당시 무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상황에서 뼈저린 한을 품고 서울로 이주해 대금 시나위에 열중했다.

방용현은 1933년경 만들어진 ‘조선음률협회’의 정회원으로 라디오 방송과 무대 공연에 출연하는가 하면 음반 취입을 하는 기회도 만들었고 굿청에 가서 대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서울 진출은 남들보다 늦은 감이 있으나 그의 피에 흐르는 예술적 혼은 후대에도 이어져 경기도도당굿의 마지막 시나위 연주자인 방돌근이 그의 손자이며, 증손녀의 딸도 한영숙류 춤을 전수해오고 있다.

40년이라는 세월을 경기시나위의 맥을 이었던 방돌근(1941~2001)은 동령제 시나위의 창시자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할아버지 방용현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경기시나위는 경기도도당굿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데 이는 경기도도당굿의 모든 반주 음악이 경기시나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사나위는 방돌근이 이끈 남양제와 방용현의 동령제, 지영희의 안산제, 그리고 광주제로 나뉜다. 현재 경기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남양제는 방돌근에 의해, 동령제는 방돌근의 할아버지인 방용현이 창시자로 전승돼 왔으며, 안산제는 지영희가 창시해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청북읍에서 태어난 김부억쇠(1900년대)는 대금 시나위의 명인으로 목구성이 우렁차고 굿을 하는 사설이 다른 이들보다도 풍부하여 높은 기량을 자랑했다. 그의 제자로는 경기도도당굿 마지막 선학습꾼으로 불리는 이용우(1899∼1987)가 있다.
 

   
▲ 평택농악

 

■ 유준홍, 전국 5대 놀이패 진위패 육성
   송창선, 남사당 꼭두각시 태평소 명인

웃다리풍물을 대표하는 농악이 바로 ‘평택농악’이지만 평택농악의 근원에 남사당이 있고 평택이 남사당패를 흥하게 한 단초가 됐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출신 유준홍(柳俊弘)은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했다. 또 그의 아들 유세기(柳世基, 1893~1985)는 농악과 시조 등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그가 풍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유준홍의 영향 때문이었다. 유세기의 부친 유준홍은 진위현 관아의 아전이면서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경영했다. 그는 전국에서 농악에 소질 있는 사람들을 종업원으로 불러 모아 평소에 농악을 연마시켜서 조선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 위안공연에 농악대를 이끌고 참여해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라는 농기〔都大房旗〕와 3색의 어깨띠를 하사받았다. 상쇠 김덕일에게는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그만큼 당시 진위남사당은 웃다리풍물을 대표할만한 실력이 있었고, 전국에서도 유명한 존재였다.

국가무형문화재인 평택농악이 무동놀이 등 사당패의 연희성과 두레굿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남사당 진위패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초대 한국농악협회장을 지낸 유세기는 1957년 《시조 창법》이란 책을 내 지금도 후학들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서정동 출신인 송창선(1911~1984)은 어려서부터 농악을 익혔고, 30세 때 호적의 대가 방태진(房泰珍)에게 배워 호적의 명인이 됐다. 1940년대 중반부터 호적잽이로 남사당패에서 연주해 1964년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음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될 때 남운용과 함께 예능보유자가 됐다. 그는 경기 능계가락을 비롯해 남도 시나위가락 등 각 지방의 호적가락에 능했으며, 제자로는 김재원(金在元)과 7살에 남사당에 입단해 그에게서 호적을 배운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 등이 있다.

사당패와 두레농악의 두 가지 특징을 조화롭게 갖춘 평택농악은 국창 이동백과 초대 한국농악협회장 유세기, 농악인 최은창에 의해 재현됐다.

 

   
▲ 평택농악 판굿 당산벌림을 하는 최은창 명인옛

 

■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이돌천·김용래
   평택민요 명인, 이민조·이종구·박용철
   평택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평택농악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최은창(1914~2002)은 팽성읍 원정리에서 태어난 직후 평택농악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팽성읍 평궁리로 이주해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하게 귀가 밝았던 그는 스스로 예능적 기질을 키워나갔다.

최은창은 마을 둥기래패(두레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웠으며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에 가담하게 되고, 절걸립패에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장고잽이와 비나리꾼, 쇠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던 최은창은 1980년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단을 꾸려 경기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85년 평택농악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을 이끌었고 이후 20여년 가까이 평택농악을 체계화시키는데 공헌해왔다.

최은창과 함께 평택농악을 이끌어 온 이돌천(1919~1994)은 천안에서 태어나 남운룡농악단, 민속극회 남사당의 법고수로 활동했다. 1980년 평택농악을 공식 결성할 때 합류해 상법고로 활동했으며, 이를 계기로 1985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법고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10여 년간 활동해왔다.

현재 평택농악의 유일한 예능보유자인 김용래(1941~)는 고향인 천안의 시골 장터에서 벌어지는 난장을 보면서 자라 12세에 무동으로 농악에 입문했다. 집안의 4대 독자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농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러다 평택농악의 명인 최은창을 만난 것을 계기로 농악에 깊숙이 빠지게 됐다. 당시 서울남사당에서 활동하던 최은창이 그를 불러들이면서 평택농악과 인연을 맺었으며, 16세부터는 이돌천으로부터 법고를, 최은창으로부터는 쇠가락을 배웠다. 평택농악에서 당대 최고의 법고잽이로 명성을 날렸으며, 평택농악의 사라진 무동놀이를 복원하는데도 앞장서 지금과 같은 원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000년 7월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았으며, 수많은 국내외 공연을 통해 평택농악을 세계화하는데 힘을 쏟아왔다.

2009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평택민요는 평택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논매는 소리 ‘농요’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르던 ‘어업요’, 상여 소리인 ‘장례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농요의 이민조(1935~)는 25대째 포승읍 방림리에 거주하면서 10살 때부터 마을 풍물을 배우기 시작했고 평택농악과 남사당에 합류해 법고, 꽹과리, 열두발상모, 태평소 등을 고루 익혔다. 성년이 되어서는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포승지역에 전해오는 지경 다지는 소리와 논매는 소리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받음 소리’로 시작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메기는 소리(선소리)’를 할 정도로 배우는 실력이 뛰어났다.

어업요의 이종구(1923~2014년)는 현덕면 신왕1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갯가소리를 배웠다. 장례요의 박용철(1929~2010)은 포승읍 홍원2리에서 태어나 가업인 농업에 종사하며 마을 어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민요를 따라 듣고 배웠으며, 집안과 마을 어른들로부터 상여 소리, 회닫이 소리, 모내기 소리 등을 전수받았다.

평택은 질박한 서민의 정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인을 껴안을 줄 알았고, 그들이 터를 잡아 생활하도록 배려할 줄 아는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는 고장이다. 이러한 토양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평택의 전통예술이 뿌리내리고 번성하는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특히 평택농악은 2014년 11월 27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인과 함께하는 자랑스러운 공동체문화의 콘텐츠가 됐다. 이를 계기로 평택은 전통예술의 뿌리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예술의 시발지로 세계 음악을 선도해 나가고 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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