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천하를 주름잡던 명창들도 ‘적벽가’라면
그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는
대단한 명창이 바로 ‘모흥갑’

 

모흥갑, 경기 진위와 죽산 등 출생설 있지만 진위 태생으로 알려져
임금이 소리꾼을 총애해 벼슬을 하사한 어전명창은 모흥갑이 최초
송흥록, 안성판 ‘춘향가’에서 당대 ‘적벽가’ 최고 명창 모흥갑 꼽아



 

 


Ⅲ. 평택의 예인藝人
1. 소리
1) 평택의 명창(名唱)-1 모흥갑(牟興甲)
 

■ 모흥갑, 권삼득·송흥록·염계달과 함께
   19세기 전기 8명창으로 이름 날려

조선말 순조 때 소리의 임금이란 뜻으로 가왕歌王이라 일컬어진 송흥록, 적벽강 불 지르는 대목을 부르면 소리판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는 방만춘, 자룡子龍이 활 쏘는 대목을 부르면 신출귀몰한 솜씨를 보였다는 주덕기, 이런 천하를 주름잡던 명창들도 ‘적벽가’라면 그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는 대단한 명창이 바로 모흥갑이다.

모흥갑은 순조~헌종~철종 때 권삼득·송흥록·염계달 등과 함께 19세기 전기 8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송흥록(宋興祿, 1801~1863년)보다 2~3살 어리다는 것으로 보아 1803년(순조 3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송흥록이 모흥갑, 신만엽, 김덕선 과거급제 행렬에 참여했다는 점으로 보아서는 송흥록보다 앞선 1776년(영조 52년)에서 1796년(정조 2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명창 모흥갑은 경기 진위振威와 죽산, 전북 김제와 전주 출생설이 있지만 진위 태생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만년晩年은 송흥록의 고향 인근인 전주 난전면 귀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다 80여 세까지 향수하였다. 모흥갑 명창이 경기도 출신이라는 것은 그의 유일한 더늠으로 전해지는 <춘향가> 중 이별가에서 ‘날 다려가오’하는 대목의 선율이 경기민요조인 경드름京調의 일종인 ‘강산제’라는 조調로 되어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소리 스승이 누구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모흥갑은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하여 높은 소리를 잘 질러내 후세사람들이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가창에 있어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났으며, 성음이 월등하게 청미하였다고 한다.

 

■ 모흥갑, 헌종 앞에서 ‘적벽가’ 불러
   헌종, 종이품 벼슬 동지중추부사 제수

모흥갑은 소리를 배우기 위해 12살에 입산해 10년 공부를 마치고 대성한 명창이다. 모흥갑이 가장 잘 부른 판소리는 ‘적벽가’였고 ‘적벽가’만은 어느 누구도 모흥갑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 존재라고 평한다. 이 ‘적벽가’는 중국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주로 엮은 것인데, ‘적벽가’는 서장, 도원결의, 삼고초려, 공명출려, 공명의 지혜, 동남풍 빌고, 적벽대전, 조조의 신세, 화용도, 관우의 관용 등 열 대목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가 활약하던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양반층이 판소리의 주요 관객으로 등장하면서 양반들의 축하연은 물론이고 임금 앞에서 판소리를 부르는 일이 일반화되던 때였다. 1847년(헌종 13년)에 그의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당시 영의정 김좌근의 부름을 받고 헌종 앞에서 ‘적벽가’ 중 ‘장판교 대목’을 불렀다. 지금도 소리꾼들이 이 대목을 부를 때는 반드시 ‘모흥갑 더늠’이라고 밝힐 정도로 유명한데, 그의 완숙한 기량에 헌종을 위시해 삼정승 육판서 이하 어전에 나열한 조신들은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리고 흥분하여 탄성을 울리면서 그의 판소리에 열광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그 기량을 높이 여겨 비록 이름뿐이긴 하지만 중추부에 속한 종이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제수 하였다. 이처럼 임금이 소리꾼을 총애해 벼슬을 제수 받은 어전명창은 모흥갑이 처음이었다. 이후 모흥갑은 공경대부들의 부름을 받아 명성을 쌓았고, 보수도 수만 냥을 벌었다고 전한다.

특히 흥선대원군과 고종, 민비는 유난히 판소리를 좋아하여 궁중에서 밤새 판을 벌이기 일쑤였으며 모흥갑을 두보杜甫라 평한 신재효에게 벼슬을 내려주어 장려하기도 하였다. 이에 힘입어 판소리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19세기 중반 이후 위로는 임금, 아래로는 천민까지 폭넓게 즐기게 되었다.

판소리 마당은 고즈넉한 정자나 공터, 대갓집 마당, 대청이나 사랑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대가 되었다. 판소리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의사가 소통되는 열린 구조라는 점이 특징이다. 임금부터 고관대작, 양반이나 천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소리꾼의 아니리와 고수의 추임새에 맞추어 나름의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운다. 그래서 판소리는 위로는 임금, 아래로는 천민까지 모두 즐기는 우리의 소리인 것이다.

판소리의 음악 갈래가 형성되던 조선시대 숙종 무렵에는 춘향가春香歌, 심청가沈淸歌, 수궁가水宮歌, 흥보가興甫歌, 적벽가赤壁歌,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가짜신선타령 등 열두 마당이었다.

그러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 소재의 판소리는 점차 불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등의 판소리 다섯 마당이 보다 예술적으로 가다듬어진 완정한 형태의 예술 음악으로 정착되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이 오늘날처럼 완성되기까지는 여러 명창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판소리사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 영·정조 무렵의 우춘대禹春大와 하한담河漢潭을 비롯하여 순조~철종 때에 활약한 모흥갑牟興甲, 권삼득權三得, 송흥록宋興祿, 염계달廉季達, 박유전朴裕全 등의 여덟 명창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판소리 더늠을 개발하고 각기 고유한 창법으로 소리를 연마하여 판소리의 음악적 표현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 모흥갑 덜미소리 10리 밖까지 들려
 〈평양감사 환영연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모흥갑은 헌종 때 평양감사 김병학의 초청으로 평양 대동강가 연광정練光亭에서 소리를 할 당시 덜미소리를 질러내어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전해져 당시의 공연이 세간에서도 매우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판소리 연희 장면인 〈평양감사 환영연도(일명 평양도)〉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0폭 병풍 중에는 모흥갑이 평양감사의 초청으로 대동강 옆으로 흐르는 능라도 연회장에서 양반들에게 둘러싸여 소리하는 장면이 있다. 평양감사는 숲 속에 자리를 깔고 앉았으며, 그 좌우로 선비들이 늘어앉거나 섰다. 한가운데서 당대 명창 모흥갑이 부채(선자·扇子)를 펴 들고 고수와 마주하여 창을 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명창名唱 모흥갑牟興甲’이라는 기록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를 ‘모흥갑 판소리도’라 부르기도 한다.

모흥갑은 ‘적벽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고, 당시 ‘적벽가’로는 그를 당할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제·制)으로 전해지고 있는 ‘춘향가’의 ‘이별가’ 중 ‘날 데려 가오’하는 대목은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그의 특징적인 고동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중에 판소리는 방안의 청중을 위해 부르는 ‘방안소리’로 바뀌게 되었지만, 모흥갑 명창이 활동하던 때만 해도 야외에서 우람하게 질러내는 ‘마당소리’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특히 그의 우람한 목소리는 장점이 되었던 것이다.

만년晩年 전주부全州府의 누정에서 있었던 명창 모흥갑과 그의 수행고수隨行鼓手였던 명창 주덕기朱德基 사이의 일화도 유명하다. 한때 송흥록宋興祿과 모흥갑의 고수였던 주덕기가 전주에 있는 다가정多佳亭에서 자신의 판소리 공연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청중들에게 모흥갑과 송흥록에 대해 “모흥갑은 부족괘론不足掛論이요, 송흥록도 유부족앙시猶不足仰視”라고 자찬하자, 이 소리를 청중 속에서 엿듣던 모흥갑이 “나는 부족론不足論이로되 송흥록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이요 가왕歌王의 칭호까지 받은 명창이어늘 주덕기는 참으로 무례막심無禮莫甚하다”라고 꾸짖고 춘향가 중 이별가離別歌를 장쾌하게 부른 후 주덕기에게 한 번 방창倣唱하여 그 승점勝點을 표시하라고 했더니, 주덕기는 감히 모흥갑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하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좌중 앞에 사죄했다고 한다. 19세기 전기 8명창 모흥갑의 수행고수에서 뒤늦게 명창의 반열에 오른 주덕기가 오만함을 딛고 일어선 것 또한 그의 음악적 바탕이 된 모흥갑과 그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 공연 때 북 반주를 하는 고수의 중요성은 “첫째가 고수이고, 둘째는 명창이다”라는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 또는 “수컷이 고수이고, 암컷이 명창이다”라는 ‘웅고수자명창·雄鼓手雌名唱’이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고수는 단순히 판소리 창자의 북 반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노래 부르는 도중 적절한 곳에 추임새를 넣어줌으로써 창가를 격려해 주기도 할 뿐 아니라, 판소리 창자가 아니리를 구사할 때는 상대역을 맡아 수행하기도 한다. 모흥갑의 고수 주덕기, 송흥록의 고수이자 동생 송광록은 고수로 시작해 명창에 이른 인물이다.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모흥갑에 대한 기록은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에서 잘 나타난다. <관우희> 제49수에는 모흥갑, 우춘대, 권삼득 등 판소리 명창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었는데 “한 곡조 뽑으면 술잔 앞에 천 필의 비단〔一曲樽前千段錦〕, 권삼득, 모흥갑이 어릴 적부터 이름 날렸지〔權三牟甲少年名〕”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1826년(순조 26년) 신위가 지은 <관극시>는 칠언절구로 모두 12수인데 작자의 문집 <경수당전고> 권34에 수록되어 있다. ‘춘향가’를 연행하는 창자의 모습과 이것을 보는 관중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단순히 연희모습을 표현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작자 나름대로 소화시켜 치밀하게 구성한 특징이 있다. 제1수는 전체의 도입부로 본격적인 연희가 벌어지기 전 구경꾼들이 모이는 광경을 묘사했다. 제2수는 구경꾼 중 남녀 간의 애틋한 정을, 제3수에서는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 목을 풀기 위해 단가를 부르는 창자의 모습을, 제4수는 <춘향가>에 대한 당시 청중들의 반응을, 제5수는 당대 명창인 모흥갑牟興甲, 고수관高壽寬, 송흥록宋興祿, 염계달廉季達, 김용운金龍雲에 대해 묘사했다.

‘귀곡성鬼哭聲’을 잘 구사하기로 이름난 송흥록 명창은 안성판 ‘춘향가’에서 “당시 명창 누구런고. 모흥갑이 ‘적벽가’며 송흥록이 ‘귀곡성’과 주덕기 ‘심청가’를 한창 이리 노닐 적에”라는 구절로 당대의 ‘적벽가’ 최고 명창으로 모흥갑을 꼽았다.

윤달선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18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판소리 가사를 정리한 신재효(申在孝, 1812~1984년)도 《광대가廣大歌》에서 “모동지 흥갑이는 관산만리關山萬里 초목추성草木秋聲 청천만리靑天萬里 학鶴 울음 시중성인詩中聖人 두자미杜子美”라는 표현으로 모흥갑 명창을 청천만리에 울려 퍼지는 학 울음소리라며 두보(杜甫, 712∼770년)의 아름다움에 비유했다. 학의 울음소리가 바로 고동상성(鼓動上聲)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대목을 강산제江山制라고 하는데 박유전朴裕全의 강산제와 구별하기 위해 ‘동강산제·東江山制’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말년에 이가 빠져 소리를 입술로 조정하여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독특한 ‘순음脣音 더늠’으로 후대의 주덕기朱德基에 의해서 방창倣唱되어 세상에 퍼졌다.

 

■ 모흥갑, ‘설상에 진저리친 듯’이라 평해
   ‘고동상성’은 모흥갑의 특징적 창법

당시 세인들이 그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이라 평한 것도 그의 이러한 창법과 무관하지 않다. ‘설상에 진저리친 듯’이라는 표현은 ‘눈 위(설상·雪上)에서 몸서리치는 모양’ 또는 ‘혓바닥(설상·舌狀)이 몸서리치는 모양’으로 표현된다.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고동상성’ 또한 그의 특징적인 창법이다. 한번 내지른 덜미소리가 10리 밖까지 퍼졌다는 일화를 함께 고려할 때, 그가 매우 풍부하고 웅장한 성량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주덕기가 방창해 널리 전한 모흥갑의 이별가 더늠 ‘날 다려가오’는 특별히 동강산제東江山制라 명명되기도 한다. 본래 경기민요京畿民謠의 음악적 특징을 나타내는 경조京調의 한 갈래인 동강산제는 명창 모흥갑牟興甲의 소리제에 든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년)이 1936년에 녹음한 ‘춘향가’ 중 ‘이별가’ 축음기 음반 음원〔Taihei C8267-A 南道소리 八名唱制(上) 李花中仙 伴奏李化成〕에도 이 대목이 ‘모흥갑의 더늠’이라는 설명으로 곡 앞에 삽입되어 있다. 이것이 그의 독특한 순음脣音 더늠으로 후대의 주덕기朱德基에 의해서 방창倣唱되어 세상에 퍼졌다.

모흥갑의 더늠은 춘향가 중 ‘이별가’인데, 이 곡조가 특이하여 강산조라고도 한다. 판소리 명창들에 의하여 노랫말과 소리가 새로이 만들어지거나 다듬어져 이루어진 판소리 대목이 바로 더늠 또는 제制이다.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 날 다려가오. 나를 어쩌고 가려고 하시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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