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6살짜리 외손녀가 감기에 걸려 콜록거린다. 눈도 제대로 뜨지를 못하면서도 굳이 어린이집에 가겠다고 찡찡거리며 보챈다. 온 가족이 몸이 아픈데도 어린이집을 가겠다고 하는 외손녀를 기특하다고 칭찬을 했다.
문득 2000년 서울대보건대학원 재학 중 수업 연장으로 미국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의료정책과정 연수를 받을 때가 생각났다. 함께 강의를 듣던 ‘룸메이트’가 심한 여름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왔다. 기침도 하고 훌쩍거린다. 그런 모습을 본 교수가 빨리 기숙사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라며 강의실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그 ‘룸메이트’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참을 수 있으니 강의를 듣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교수는 정색을 하며 걱정도 되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감기를 옮길 수도 있으니 미안하지만 강의실을 나가달라고 했다. 결국 룸메이트의 학업 열성은 남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짧은 미국생활에서 느낀 게 많다. 미국에서 여자들은 “참 예쁘시네요”라든지 “옷이 참 잘 어울려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대부분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답례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누가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대부분 정색을 하고 “어머 아니에요”라는 부정적인 말을 한다. 특히 선물을 하거나 하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보다는 ‘죄송해요’ 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선물을 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마운 마음을 솔직하게 표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의 문화적인 입장과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겸손함의 미덕으로 ‘아니다’라며 자신을 낮추는데 미국 같은 곳에서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함에 대한 답례로 ‘감사’와 ‘고마움’을 표시한다. 식탁예절 역시 한국과는 많이 다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상대방이 “더 드시지요”하며 음식을 권할 경우 체면치레로 거절하면 또 상대방은 그 의사를 무시한 채 “그러지 말고 더 드세요”하며 음식을 권하거나 심지어는 음식을 상대방의 그릇에 담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상대방이 거절할 때는 대부분 두 번 다시 권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괜찮다고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을 무시하고 또 한 번 권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처럼 같은 상황이지만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예의의 기준이 달라진다.
며칠 전 영등포문화원에 전시된 시화(詩畵)전 작품을 보면서 시어(詩語)들에 대해 음미를 해보았다. 똑같은 ‘시구’지만 각각의 생각에 따라 그 의미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 들어가면 공통된 느낌이 있게 된다.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감성도 사실은 ‘환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작품의 의미를 다소나마 이해하게 된다.
똑같은 것을 두고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일 수가 있다. 나와 다른 관점에서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각기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내 생각과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이란 단어가 더 많이 들리는 요즘인 것 같다.
소통이란 결국 이렇게 나와 상반된 시각과 사고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건 아닐까. 소통의 가장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형태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이 모여서 서로 말을 한다고 해서 대화가 된다고 볼 수 없다.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와 지켜야 할 기본예의가 있다. 이는 상대의 권리와 인격을 자기의 것과 동일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를 존중해야 그 사람의 말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듣고 또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에 대한 정당한 대응을 할 수 있다. 대화과정에서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논쟁이 된다.
대화로 하자면서 협상을 하려고 하면 그것은 ‘소통’이라 말 할 수 없다. 자신의 입장을 조금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는 논쟁을 하자는 것이지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한국인은 안타깝게도 대화와 협상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채 협상을 대화로 착각하고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불평을 한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수행하는 대화가 대부분 이런 성격의 것이다 보니 우리 사회의 소통문화를 병들게 한다.
사실 오늘만큼 소통의 수단이 다양하고 가능성이 많아진 시대는 없다. 요즘은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어 어떤 개인도 대부분의 내용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수행하는 대화는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이 시작했을 때 가졌던 생각이 수정되고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며 심화되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소통은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인격,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회의 윤리적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소통의 부재를 극복하려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솔직하고 공정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소통은 진실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소통이 부재한 것은 곧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말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서로 간에 신뢰만 할 수 있다면 소통이 원활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더 훨씬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올바른 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밝고 맑은 사회를 기대해 본다.

 

 

 

 

深頌 안 호 원
한국심성교육개발원장
심리상담사,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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