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은 내 평생의 삶 그 자체”

아내도 포기한 ‘풍물에 대한 집념’
무동·법고·북·소리 다방면의 명인

 
풍물은 순박하게 농사짓고 살던 우리 조상들의 삶 그 자체다. 각 지방마다 조금씩 특색이 있긴 하지만 꽹과리, 장구, 북, 징, 소고 등이 어우러져 각각의 소리를 하나로 화합해 신명 나는 한마당을 펼치던 풍물은 서민들의 전유물이라는 이유로 한때 천대를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민속놀이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중 평택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웃다리풍물은 화려함을 무기로 해서 무형문화재 김용래 명인을 중심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4대 독자, 유랑 연희 패에 몸담아
“풍물을 하면 밥은 안 굶을 거라고 친척 어르신이 시골 난장으로 저를 데리고 간 게 계기가 되었어요. 그때가 열세 살 때였는데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무동으로 먼저 풍물을 시작했지요. 옛날 집 지붕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 후에 키가 커서 더 이상 무동을 못하게 됐을 때는 내가 다섯 살이었던 덕수를 무동 태우기도 했지요”
김용래(74) 명인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잠시 눈을 감는다. 천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누이는 식모로, 동생과 김용래 명인은 고아원에서 살았다. 그러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동생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고아원을 나와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친척의 권유로 인해 풍물판으로 흘러들게 되었고 풍물을 하면서 김덕수 명인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양자 간 것까지 하면 4대 독자인데 내가 풍물판으로 돌아다니니까 집안 망했다고 탄식도 많았지요.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약장사 따라 전국으로 돌아다녔는데 부산에 갔을 때 4·19랑 5·16도 치렀어요. 당시에는 집회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장구랑 옷도 잡히고 빈털터리로 부산서 대구까지 걸어왔는데 오는 동안 용케 밥을 굶진 않았지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이장 댁을 찾아가 마을에 있는 악기를 빌려 한판 거나하게 벌이고 나면 밥은 그냥 주곤 했거든요”
열세 살에 천안에서 무동으로 풍물시작을 했던 김용래 명인은 1982년 평택농악에 입단해 1990년 10월 평택농악 예능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뒤 2000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몸 안에 내재된 타고난 ‘신명’
“평생 풍물밖에 모르던 사람인데 동생이 탈곡기계 사업을 도와달라는 바람에 3년 동안 같이 거들었다가 빚만 잔뜩 지게 되었어요. 쌀 한 가마에 4000원일 때 50만원 빚을 졌으니까 지금 돈으로 하면 한 1억 정도가 될라나. 그래도 동네사람들이 보증도 서주고 해서 버텼는데 그것 때문에 공부 잘하던 큰딸을 대학에도 못 보내고 딸이 직장에 나가 번 돈을 보태 적금을 들어 빚을 갚았지요. 지금도 그게 제일 마음 아파요”
김용래 명인은 5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그 빚을 갚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김용래 명인은 풍물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며칠 씩 풍물패속에 파묻혀 있다 돌아오곤 했다. 풍물을 하지 않으면 자꾸 몸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이놈의 풍물은 왜 그렇게 좋은지. 한번은 아내하고 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징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내는 무슨 징소리냐고 타박했는데 내 귀에는 분명히 들렸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3㎞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실제로 풍물놀이를 했었더라구요. 나도 깜짝 놀랐지요. 그 먼데서 들리는 징소리가 다른 사람은 다 못 듣고 내 귀에만 들렸으니까요. 나도 그러고 보면 내 안에 풍물에 대한 뭔가가 있긴 있나 봐요”
김용래 명인은 1년이면 60~70%는 밖에서 생활하는 자신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가정과 풍물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말에 다신 안하겠다며 상모랑 옷을 다 불태우고 목수 일을 하기도 했으나 1년간 풍물을 쉬다 보니 결국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몰래 나가서 풍물을 했고 그러다 아내에게 들키고 난 뒤에는 아내도 결국 김용래 명인의 뜻에 따라줬다고 말한다. 그렇게 풍물에 대한 집념으로 인해 밖으로만 떠돌던 자신을 대신해 삯바느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아내는 45년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풍물, 절실함으로 이어가야
“상모는 7~8세 될 때부터 돌렸어요. 난장을 보고난 뒤면 혼자 한지를 붙여 만든 걸 돌려보곤 했으니까. 그러다 풍물에 접어들고 나서는 상모 돌리는 형들이 곤히 잠들고 나면 몰래 상모를 훔쳐가지고 나와서 혼자 연습하곤 했지요. 그러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신 분의 상모를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상모를 돌렸지요. 이돌천 선생님이 가끔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는데 그렇게 평생을 풍물과 더불어 살다보니 2000년에 인간문화재 호칭을 주더라구요”
김용래 명인은 현재 평택농악보존회관 근처에 집을 짓고 딸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데 덕분에 풍물을 전수받고자 하는 후학들을 자주 만날 수 있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겐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욕심이 생긴다. 풍물 하는 제자들이 예전의 자신처럼 배고프게 지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지금도 평택농악보존회를 찾는 수강생은 많아요. 그중에서도 제법 타고난 끼를 보이는 수강생도 있지요.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저도 신명이 납니다. 현재는 여섯 팀이 연습하고 있는데 예전 우리들처럼 절실함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배우고 익히려는 모습을 볼 때면 항상 대견한 마음이지요”
무동으로 시작해 상모를 돌리고 법고를 치며 또, 판굿 소리로 평생을 풍물과 함께 살아온 김용래 명인,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인간문화재라는 위치에까지 올랐지만 그는 아직도 어디선가 풍물 소리만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오는 신명으로 어깨춤을 덩실대곤 하는 그야말로 풍물이 절실한 예인(藝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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