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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3
박성복 기자  |  sbbar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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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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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선천적 타고난 성음으로
광대의 네 가지 요건인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모두 다 갖춘 명창 ‘이동백’

 

고종에게 당상관堂上官 벼슬인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제수 받아
1908년 9월 ‘적벽가’ ‘심청가’ 녹음, 최초의 판소리 음반으로 기록
1939년 이후 10년간 평택 칠원동 거주, 후학양성과 평택농악 재현


 

 


Ⅲ. 평택의 예인藝人
1. 소리
1) 평택의 명창(名唱)-2 이동백(李東伯)


 

   
▲ 근대판소리 5명창 이동백(1866~1950)

 

■ 이동백, 20세기 판소리 근대 5명창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계승자

20세기 판소리 근대 5명창 중 한 사람이며 ‘새타령’과 ‘백발가’에 능했던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계승자인 이동백(1866~1950년)은 1866년 2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庇仁面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종기李鍾琦, 아명은 동백東伯으로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865년 10월 아버지가 작고해 홀어머니에게서 궁핍하게 자라다 큰아버지에게 양육되기도 했다.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의 6촌 여동생이 무속인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행해져온 ‘은산별신굿’ 예능보유자인 이어린년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창우집단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동백 명창이 무속 음악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음악에 대한 조기학습이 충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동백은 여덟 살 무렵에 서당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났던 그는 13세 때 부인 박씨와 결혼 한 후 15세에 큰아버지 댁에서 나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다. 어려운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는 처지였으므로 소리를 향한 그의 집념이 불효라는 마음도 많이 들었으나 결국 결심을 굳히고 15세에 소리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15세 때 최상준과 중고제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金正根을 찾아가 소리공부를 시작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했다. 또한 서편제의 시조로 알려진 박유전의 제자인 이날치에게 소리공부를 했다. 20세 전후에는 서천군 종천면鐘川面 호리산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했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했다.
이처럼 이동백은 중고제와 동편제, 서편제의 소리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중고제인 김정근의 소리를 가장 근본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를 중고제 명창으로 부른다.
집안의 반대로 어렵게 소리 공부를 한 이동백은 25살 무렵부터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점차 명성을 얻게 됐다. 창원에 머물던 때인 1891년 창원부사 앞에서 ‘새타령’을 불렀는데 이로 인해 단번에 명성을 얻게 됐고, 경상도관찰사 이지용은 이동백의 천부적 소리를 인정해 그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 이동백의 새타령 음반

■ 37살 때인 1902년 서울로 올라가
   원각사에서 소리하며 서울 무대 장악

이동백은 37살 때인 1902년에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원각사에서 소리하면서 서울 무대를 장악했는데, 김창환, 송만갑 등과 창극운동에 참여했고, 이때 선배 명창 김창환의 주선으로 어전御殿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했다. 이동백에 대한 고종의 총애는 대단했는데, 이동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원각사 소리 공연에 전화선을 대고 그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이동백은 고종에게서 당상관堂上官 벼슬인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 받게 된다.
고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동백을 대궐로 불러 들였다. 고종과 관련한 일화도 남아있다. 고종 앞에서 소리를 하면서 ‘천리강산’을 길게 뽑아서 창을 하자 고종이 “너는 어째서 그다지 길게 창을 하느냐?”고 묻자 “천 리를 가려면 얼마나 길이 멀겠습니까?”하고 답하니, 고종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너는 진정한 명창이로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1906년 일제에 의하여 원각사가 폐쇄된 후, 1908년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여하고 삼남三南 일대를 순회공연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08년 9월에 이동백은 미국 빅타음반에서 SP음반으로 ‘적벽가’ 중 ‘조조가 비는데’와 ‘심청가’ 중 ‘심청이 자탄하는데’를 녹음하는데 이는 김창환, 김봉이 등과 함께 판소리 음반으로는 최초의 것이 된다.
1908년 첫 음반 녹음이후 일축조선소리방, NIPPONOPHONE, Victor, Columbia 등에서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특히 일축조선소리방에서의 ‘춘향가’ 녹음은 앞 대목부터 순차적으로 상당 부분이 녹음됐는데, 이들 녹음 자료에 의해 이동백의 춘향가 한바탕을 대략적으로나마 정리해 볼 수 있다.
또한 창극 음반도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의 세 바탕을 남겼는데. 1926년 일축조선소리방에서 김추월, 신금홍과 ‘춘향가’를, 1935년 Polydor에서 김창룡, 임소향과 ‘적벽가’를 녹음했다.

■ 1915년 경성구파배우조합 설립에 기여
   경성방송국에 출연, 판소리 대중화 앞장

1915년에는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이 설립됐는데 설립초기부터 이동백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경성구파배우조합은 극장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남녀 음악가들로 조직되었고, 이동백李東伯, 김창환金昌煥, 김인호金仁浩, 김봉이金奉伊 등이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창극을 중심으로 하는 남도 음악 결속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동백은 1915년 이후부터 이 집단의 선생 역을 맡으면서 나머지 구성원들을 선도해 나갔다. 이 무렵 전후로 서울의 연흥사, 장안사 두 극장 등에서 창극조가 매일 연행됐지만 영화와 신파극이 대중적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창극조는 점차 무대를 장악하지 못하게 됐다. 결국 배우조합은 지속되지 못했고, 여기에 속했던 음악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된 이후에는 방송 활동까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판소리 대중화에 앞장섰다. 이동백은 판소리 발전과 후진 양성에도 큰 뜻을 갖고 있었다. 이에 1934년에는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발족하게 된다. 평소부터도 판소리의 근본을 귀하게 생각했던 그는 이사장직도 역임하면서 이 연구회를 통해 판소리의 근본을 다지고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바로 이동백,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으로 소위 근대 5명창으로 불린다. 근대 5명창 중에서도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명창이 바로 이동백이다. 이동백은 수려한 외모와 함께 타고난 천구성과 뛰어난 너름새로 20세기 전반 음악계 전체를 주도했다.

   
▲ 이동백 은퇴기념 만주공연 기념사진(1939년 8월 5일)

■ 신재효, “이동백은 광대 조건에 딱 맞아”
   1939년 경성부민관에서 ‘은퇴기념연주회’

19세기에 판소리의 후원자로 이름 높았던 신재효는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으로 “광대라 하는 것은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지차 득음이오, 그 지차 너름새라”라고 명시했다.
이동백은 이 같은 광대의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사내다운 훤칠한 키에 건장한 몸집, 잘생긴 이목구비, 귀태가 넘치는 자태를 갖췄으며, 거기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음과 기품 있는 너름새를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1902년 서울에 올라온 이후 근 40년간을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동백은 후진들을 위해 은퇴를 결심하고 1939년 3월 29일과 30일 이틀간 경성부민관에서 ‘은퇴기념 연주회’를 가졌다. 이동백의 은퇴기념 연주회는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여러 차례 이뤄졌는데 많은 명창들이 이동백의 은퇴 공연에 함께 출연했다. 은퇴공연 때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 달 동안이나 국내는 물론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 1939년부터 평택 칠원동에서 만년 지내
   만년에 평택농악 재현·후학 육성에 기여

1939년 은퇴 직후 평택시 칠원동 새말에 집을 장만해 만년을 지냈다. 이동백이 평택에 정착한 이유는 만년에 얻은 부인이 평택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940년 박록주 등의 후배 소리꾼들의 간청으로 다시 일선에 나와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전처럼 활발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는 평택 자택에서 머물다가 1950년 6월 6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만년晩年인 74세에 평택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낸 이동백 명창의 묘는 그의 집에서 동쪽 원곡면 내가천리 두리봉에 묻혔다가 묏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족과 후배 국악인들에 의해 화장됐다. 하지만 이동백 집터와 그의 흔적들은 칠원동 새말에 올곧이 남아있다.
어릴 적 이동백 명창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주민들은 그에 대한 회상을 전한다.
이동백 명창은 10여 년간 평택 칠원동 새말에서 지내면서 평택지역 농악을 재현하고 후학을 육성하는데도 기여를 했다. 평택에서 보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칠원동 인근의 덕암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동백이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심청가’였다. 소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도 ‘심청가’를 들은 후에 그 내용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동백의 음악이 후대로 전승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첫째가 그가 부르는 중고제가 당시 유행과 거리가 있는 고풍스런 소리였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의 즉흥적인 창법 때문에 제자들이 그의 소리를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동백은 탁월한 성대에 아름다운 울림, 넓은 음역, 풍부하고 화려한 음향으로 보기 드문 기량을 가진 명창이었다. 당대 송만갑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명창으로 “성음聲音이 극히 미려美麗 하거니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목청은 들을 때마다 청신淸新한 느낌을 준다”고 후세에 기록하고 있다.

■ 이동백, 20세기 전반 최고의 판소리 명창
   가장 큰 업적은 중고제 명맥 이어온 것

이동백은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판소리 명창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판소리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다. 오늘날 그의 소리 인생의 의의를 되새겨보면 가장 큰 업적이 중고제 명인으로 20세기 중반까지 중고제의 명맥을 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소리가 당시 유행에서 도태됐고 즉흥적인 측면이 많아 현재까지 전승되지 못했지만 중고제는 20세기 전반까지 판소리 영역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하나의 독립적인 유파였다.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보다 고졸古拙한 옛 스타일을 많이 간직한 소리로 그 소리들을 통해 20세기 이전의 판소리를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유성기 음반을 통한 그의 소리 유음은 판소리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소리 인생의 의의는 공연집단인 ‘경성구파배우조합’이나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20세기 전반 판소리의 공연 문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은 여러 근대 문물의 도입으로 판소리가 상업화, 대중화되던 시기였고, 공연 형태에 있어서는 1인 입창의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그 연행 형태가 변화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이동백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여러 단체들에서 활동하면서 판소리의 변화를 주도했고, 후진들을 양성했다.

   
▲ 이동백이 평택 칠원동 새말에서 만년을 지내던 집이 있던 터(오른쪽 둥간 청색 지붕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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