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논·밭이 많이 분포한
동북부·중부지역은 농요,
바닷가에 접한 서남부지역은
어업요가 발달한 ‘평택의 민요’

 

논일·밭일이나 땔감을 할 때, 고기잡이를 할 때 부르는 ‘노동요’
망자의 저승길을 축원하며 부르는 상여소리·회다지소리의 ‘장례요’
마을신인 당목과 우물·장독·부엌에서 하는 고사소리 ‘세시의식요’

 

 


Ⅲ. 평택의 예인藝人
1. 소리
2) 평택지역 민요民謠의 유래와 전승

■ 기원祈願·기복신앙祈福信仰과 평택

평택은 동북부지역에 일부 산맥이 형성돼 있지만 서남부지역으로 갈수록 높은 산은 없고 대단위 평야지대가 형성돼 농사를 주로 지었다. 바다와 접한 서해안지역은 대규모 방조제와 항만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했다.

민요는 논·밭일이나 땔감을 할 때 그리고 고기잡이 때 부르는 노동요를 비롯해 상여소리나 회다지소리로 불리는 장례요, 당목과 우물·장독·부엌에서 하는 고사소리인 세시의식요, 물레나 베틀작업과 힘든 시집살이에 대한 푸념이나 아이를 재울 때 여성들이 부르는 부녀요,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나 장시에서의 각설이타령 등 유희요로 구분된다.

평택의 민요는 조흥·권면·인생무상·풍년기원·충효·연정 등의 내용을 담은 노동요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풍년을 기원하며 부르던 모내기 소리와 논매기 소리, 풍어를 기원하는 노 젓는 소리와 그물 당기는 소리가 많이 전해진다. 또한 해학·풍자·놀림·유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만가는 노동요 다음으로 많은 분포를 나타낸다.

특히 논·밭이 많이 분포한 평택 동북부지역과 중부지역은 농요가, 바닷가에 접한 서남부지역은 어업요가 발달했다. 이와는 별도로 세시풍습과 관련한 고사소리는 두레농악과 걸립농악을 하면서 연행됐는데 태평성대, 농사풀이, 살풀이 등을 주로 불렀다.

평택지방 민요의 흐름은 노동요와 의식요 등에서 받는 소리가 필수적이다. 평택지역의 특수한 후렴으로는 논매기 소리의 ‘얼카덩어리’와 ‘흥개 방개가 논다’, 만가 중 ‘어거리 넘차 너호아’와 지경소리의 ‘이혀라 지장호’, 장례요의 ‘어히혀라 달공’ 등이며 대체로 반복되는 형식이 두드러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 평택민요 농요 타작소리

■ 농요農謠

농요의 가창목적은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통일된 동작의 창출과 오랫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농작農作에 있어서 일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표현되는 소리이다. 농요는 거의 공동체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창출됐으며, 특히 선창자先唱者의 기능에 따라 많은 변화를 나타내게 된다.

농요는 모심기 소리, 논매는 소리, 소모는 소리, 김매기 소리, 타작 소리, 나비질 소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소리마다 각기 독특한 선율과 사설을 보이고 있는데, 그 내용은 풍년의 기원, 신세타령, 가정의 안녕 기원, 정요情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을 매거나 초벌매기에서 만물매기가 끝나는 날까지 이어졌던 두레소리는 협동심을 일깨우고 힘을 북돋우는 소리로 널리 불려왔다. 4월부터 6월 사이에 불리던 노래로 농부·용두레·새참 내는 아줌마·소리꾼과 풍물패 등의 노래가 있다.

봄철, 목청 좋은 선소리꾼이 독창으로 ‘모내는 소리’를 선창으로 메기면 여러 사람들이 합창으로 후렴구를 받는데 물을 댄 논에 모춤을 흩어놓으면 농민들이 풍물 장단에 맞춰 들어와 일렬로 늘어서서 모를 심고 북잽이는 논에 들어서서 왔다 갔다 하며 북을 치게 된다.

모심기가 끝나고 벼가 자라면 논을 매는데 이때도 두레가 이뤄져 풍물과 농기·영기 등을 만들어 행진곡 삼아 부르며 논으로 간다. 논에 이르면 쇠잽이 몇 사람이 풍물가락을 치는 가운데 농민들은 느린 굿거리장단에 맞춰 소리를 한다. 보름 후 호미로 초벌을 맬 때 새참 아주머니들이 막걸리나 부침개·밥 등을 논으로 내오면 새참 먹은 뒤 쉬는 잠깐 사이에 자진모리로 시작되는 비단타령을 부르며 놀이를 한다. 또 보름 후 두벌매기를 할 때도 선소리와 후렴구 제창은 이어지며 잠깐 쉬는 시간에는 작대기로 상여놀이를 하면서 힘든 일을 잊는다.

이로부터 보름 후에 하는 세벌매기 때는 느린 동작으로 두 패로 나뉘어 기러기 모양으로 원형을 만들고 휘모리장단에 맞춰 ‘영차 영차’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끝내기 신호를 한 후 춤을 추며 논다.

평택은 대부분의 지형이 구릉지나 평야이기 때문에 밭농사보다 논농사의 비중이 커 힘든 농사일을 흥으로 이어가기 위한 두레가 매우 발달했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마을에 두레가 하나씩은 있었다. 두레는 주로 김매기에 필요한 노동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행해졌으며, 농사의 풍요와 관련이 있는 각종 제의와 민속놀이 등에도 쓰였다. 이렇게 성행하던 두레는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 농기계의 발달과 제초제 등의 사용으로 사람의 힘으로 행했던 농작업들 대신 경제적 효율성을 선택하면서부터 급속하게 사라지게 됐다.

▲ 평택민요 농요 모내기

평택에서 행해져온 ‘모심는 소리’는 평택민요 농요 보유자인 포승읍 방림리 이민조, 지산동 최인집, 포승읍 홍원1리 염수영·이상록, 진위면 봉남리 오문목·정정덕, 서정동 정태진, 오성면 숙성2리 이철승, 고덕면 두릉리 정유석, 고덕면 당현리 천백식, 청북읍 현곡리 박용무, 고덕면 동청리 김연후·최기원·심재욱·정유석 등에 의해 1980~90년대 채보돼 평택 전 지역에서 전해 내려왔다.

‘논맴 소리’는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팽성읍 평궁리 최은창, 평택민요 농요 보유자인 포승읍 방림리 이민조, 현덕면 인광1리 박금환, 진위면 봉남리 정정덕·오문목, 포승읍 홍원리 박용철·전상은, 청북읍 어소리 서병달, 청북읍 현곡리 박용무, 고덕면 동청리 김연후, 중앙동 현기천·장봉국, 송북동 김주웅·장창교 등에 의해 1980~90년대 채보돼 전해 내려왔다. 현재는 평택민요보존회에서 평택시 서부지역에서 연행됐던 농요를 전승해오고 있다.

■ 어업요漁業謠

평택 어업요는 경기남부지역에서 전승되는 거의 유일한 어업요이며, 1995년까지 경기도에 속했던 강화나 옹진지역 어업요와는 음악적으로 구별된다.

평택의 어업요는 경기만을 따라 서해 포구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주로 포승읍, 청북읍, 현덕면에서 행해져왔다. 포승읍 만호리는 평택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구로 충남 당진과 바다를 끼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어 큰나루의 역할도 함께 했다. 포승읍 신영리와 현덕면 권관리, 대안리, 신왕리, 팽성읍 노양리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숭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숭어 막살이가 성행했으며 임금에게 진상할 정도로 숭어가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평택호방조제와 남양호방조제, 평택항 건설로 포구가 대부분 사라졌다.

평택 어업요는 고기잡이배가 바다로 나가는 과정부터 닻을 내리고 감을 때, 고기 잡을 때, 포구에 도착해 잡아온 생선을 달거나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과 흥정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해안에서 특히 많이 불리던 닻 감는 소리는 배를 정박하거나 내렸던 닻을 위로 감아올릴 때 부르는 소리로 간만의 차가 심해 선착장에 배를 댈 수 없는 서해안에서 갯벌에다 배를 정박시키거나 바다로 출항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메기는 소리는 대체로 사설 적이거나 가락이 제법 들어있지만 받는 소리는 힘을 모으기 위한 단조롭고 짧은 가락으로 이뤄져 있다.

배치기는 만선으로 귀향하거나 풍어놀이를 할 때 부르는 소리로 다른 어업요에 비해 유희적 성격이 강하다. 북·장구·징 등의 반주악기가 곁들여지고 춤까지 동원되는데 이는 놀이를 위한 소리이기 때문에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가 모두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흐르며 일반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어렵고 고도로 승화된 예술적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어업요 가운데 ‘닻감는 소리’와 ‘돛다는 소리’ ‘바다질 소리’는 포승읍 만호리와 현덕면 대안리, 신왕리 등에서 행해졌는데 최근까지 평택민요 어업요 보유자였던 현덕면 신왕1리 이종구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며, 현재는 평택민요보존회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의식요儀式謠

의식요는 사람의 일생에 따르는 관혼상제冠婚喪祭와 일 년 동안 절후에 따르는 세시의식歲時儀式을 거행하면서 부르는 민요로 그 기능이 의식의 수행과 직결된다. 성격에 따라 세시의식요, 장례의식요, 신앙의식요 등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세시의식요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생활하는 가운데 재앙을 극복하고 다복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안택 노래, 서우풀이, 풍신제 노래, 농신제 노래, 달맞이 노래와 같은 가정 의식요와 지신밟기, 고사반, 걸궁 노래, 서낭숙 노래, 기우제 노래, 뱃고사 노래, 용왕제 노래 등과 같은 마을 의식요가 있다. 평택에는 집을 지을 때 터를 다지는 지경소리와 지신밟기에 해당하는 고사반 같은 마을 의식요가 남아있다.

장례의식요 중 상여 소리는 장례 때 망자를 상여에 싣고 장지까지 이동하며 부르던 노래로 선창자가 요령을 흔들며 민요가사를 선창하면 상여를 멘 사람들이 후렴을 받는다. 달구질 소리는 장례 때 망자를 땅에 묻고 달공질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로 묘를 축조한다는 점에서 노동 기능도 갖고 있으나 장례의 중요의식 중 하나로 망자의 무덤을 산자들이 함께 밟고 저승길을 축원하는 의식적 요소가 더 강하다. 메기는 사람이 북을 치며 노랫말을 선창하고 달공질하는 사람들은 연추대로 묘를 다지면서 합창으로 따라 부른다.

▲ 평택민요 장례요 상여소리

상여 소리는 평택민요 장례요 보유자였던 포승읍 홍원2리 박용철, 서정동 장봉국, 서탄면 금암2리 조제우·조원주, 회다지 소리는 포승읍 홍원2리 박용철, 서탄면 금암2리 조제우·조원주 등에 의해 1980~90년대 채보돼 이어져 내려왔다. 현재는 평택민요보존회에서 전승해오고 있다.

세시의식요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농경사회의 풍속으로 해마다 농사력에 맞춰 행해지는 세시풍속을 행할 때 부르는 민요이다. 주로 지신밟기나 서낭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로 ‘지신밟기노래’, ‘고사요’가 있으며, 가정의 태평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고사 소리는 두레농악과 걸립농악의 특징이 함께 담긴 웃다리풍물의 대표인 평택농악에서 전승해오고 있다. 평택농악 고사꾼들은 촌걸립과 절걸립으로 통칭되는 걸립을 통해 고사소리를 이어왔다. 평택농악 보유자였던 팽성읍 평궁리 최은창은 고사소리 명인으로 이름을 알렸고, 작고한 이성호·이영옥, 현 평택농악 보유자인 팽성읍 평궁리 김용래가 소리를 이어오고 있다. 1980년대 평택농악에서 활동했던 현 평택민요 농요 보유자인 포승읍 방림리 이민조도 고사 소리를 잘한다.

■ 기타 민요

여성들이 주로 불렀던 부녀요 중 가장 대표적인 노래는 ‘시집살이 노래’로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고된 삶에 대한 한탄과 의지로 보편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 갓 시집온 새색시의 사연을 담고 있는 시집살이 노래는 시집 식구들의 몰인정한 대우를 참거나 때로는 지혜로 시부모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아 구비문학 형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평택의 민요에도 이러한 부녀요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시집살이요를 비롯해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한이 배어있는 물레타령이나 방아타령, 베틀노래, 자장가, 애 어르는 소리 등이 대표적으로 전해진다.

1980~90년대 평택지역에서 채록된 부녀요로는 시집살이 노래로 진위면 갈곶리 김씨와 서정동 강순희, 물레 노래는 진위면 갈곶리 김씨와 송북동 이씨, 베틀 노래는 송북동 이씨, 자장가는 송북동 이씨가 부른 노래를 채록해 기록으로 남겨져있다.

최근 들어 평택의 민요 가운데 농요, 어업요, 장례요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전승단체인 평택민요보존회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평택 각 지역에서 창자들에 의해 전승되어온 농요, 어업요, 장례요는 2004년부터 이민조·이종구·박용철·어영애 등에 의해 기록과 채보 등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이 가운데 농요는 ‘평택 포승두레소리’라는 명칭으로 2007년 제16회 경기도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해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가장 먼저 전승의 기틀을 마련했다. 2009년 3월 19일 평택민요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체종목 지정과 함께 3월 19일 ‘민요’에 이민조, 6월 29일에는 ‘어업요’에 이종구, ‘장례요’에 박용철이 각각 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2017년 6월 3일 평택민요 장례요에 어영애, 어업요에 이의근·인원환 씨가 추가로 보유자로 지정돼 활동하고 있다.

평택민요보존회는 매년 상설공연과 정기발표공연, 특별공연, 초청공연을 통해 평택지역에서 전해오는 민요를 보존, 전승해오고 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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