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내게 찾아온 최고의 기회”

“아이들이 변하자 부모도 움직이기 시작”
“불우한 어린 시절, 태권 정신으로 승화”

 
올 여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는 평택시를 홍보하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의에서 열린 한국주간 행사에서 평택시를 대표하는 태권도 시범단이 태권도 종주국 한국의 위상을 보여준 것.
더욱이 평택시태권도시범단은 성인이 아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청소년만으로 구성되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창단한지 1년을 갓 넘은 시범단이 많은 선양 시민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택시 진위면에서 ‘타이곤태권도장’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 해온 정진현 단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 진위에 내려온 것은 2000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진위지역은 평택도 오산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 속에서 생활수준이 넉넉지 않은 지역이었고 인근 학교들도 문제 학생이 많은 곳으로 소문이 난 그런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도장 경영도 어려웠죠”
어린 시절 공부에는 취미가 없이 문제아로 방황하던 정진현 단장에게 우연히 접한 태권도는 인생행로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최고의 기회였다. 자신의 삶이 그래서였을까. 태권도가 없었으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그에게 자신이 밥을 먹고 살아가는 지역의 청소년들이 손가락질 받는 모습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무엇인가 특색 있는 것으로 도장을 키워나가야겠다고 고민하던 중에 청소년들의 혈기를 발산시키기에는 ‘겨루기’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즉시 팀을 만들어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죠”
개관 첫해부터 참가한 겨루기 대회부터 내리 4년간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타이곤태권도장’은 평택지역 태권도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나름 성과를 거둬 만족할 만 하건만 정진현 단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2010년까지 겨루기 팀을 가르쳤는데 결국엔 아이들의 진로가 문제가 되더군요. 대학 진학은 물론 취업의 좁은 문을 뚫기 위해서는 겨루기만을 가지고는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평택시에 아직 태권도시범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2011년 6월, PT 태권도시범단을 창단한 정진현 단장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주변의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세대의 청소년들을 모아 무료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50명의 단원 중 20여명이 단복조차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대인기피증을 가진 아이, 선천성 난청을 가지고 있는 삼형제, 심지어는  부모의 상습 폭력으로 온 몸이 멍투성인 아이도 있었는데 모 방송 프로그램에 제보해 도움을 받기도 했죠”
인근 고등학교 일진으로 유명했던 학생 두 명도 창단 초기에 시범단에 합류했다. 혹시나 말썽을 일으키진 않을까 주변의 염려도 많았지만 정진현 단장은 찾아온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알고 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더군요. 대화할 상대가 없었고 마음에 아픔이 많았던 것이 폭력으로 나타났던 거죠”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모들도 호응을 해주기 시작하며 시범단이 자리를 잡아갔다. 가장 염려했던 일진은 시범단의 에이스로 거듭났고 이번 선양 공연을 계기로 사범으로 초청 받아 취업 1호의 기록을 남기며 후배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존재가 됐다.
“평택시태권도시범단이라고 하니 시에서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저희 시범단은 단 한 푼도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항공료도 전부 자부담이었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여름철 진위천에서 까맣게 그을리며 아르바이트를 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심지어는 도복이 전부 단벌이어서 중국에서 저녁에 공연을 하고는 옷을 밤새 말려 다음 공연에 다시 입곤 했습니다. 솔직히 너무 어려울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고향이 아니지만 고향보다 더 큰 애정을 가지고 평택의 태권도 전도사로 나선 정진형 단장. 자신의 가르침이 누군가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의 사전엔 포기란 없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