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지기 돌보기가
꽃가꾸기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 이은숙 원장
경기엘림어린이집

2004년 개봉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어린이 학대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영화는 성탄절 전에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열두 살의 장남 아키라, 둘째 교코, 셋째 시게루, 막내 유키까지 네 명의 아이들을 그린 영화이다.

장남인 아키는 조금 가진 돈으로 편의점 인스턴트 음식을 사가지고 동생들을 먹이고 엄마 없는 슬픔을 동생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도시에서 방치된 채 묵묵히 살아간다.

이 영화는 영상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인 극대화를 사용해 매를 맞거나 물건을 던지는 신체적 폭력은 포함되지 않았다. 단, 그 외의 모든 학대의 유형이 직간접적으로 이야기에 녹아나 있어 보이지 않는 학대의 유형이 세밀하게 묘사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놀라게 하는 수많은 아동학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장소가 당연히 보호 받아야 했던 ‘가정’이었다면, 더욱 충격적이다. 또 사회적으로 가정의 양육 기능이 영유아 보육·교육기관으로 많은 부분 이양됐는데, 믿고 신뢰해왔던 어린이집과 유치원마저도 학대 사건이 발생되면서 사회적 우려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분명 법으로 인성교육을 의무화하며 모든 교사들의 학대예방교육을 실시하고, 교실 속 곳곳에 CCTV를 설치하는 등 더욱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려는 많은 제도와 법안을 제·개정하고 있는데, 왜 우리 사회는 이런 아동학대 대책에 대한 근본적 한계를 갖는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4남매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젊은 엄마의 마음, 쉬는 시간도 없이 극한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교사의 육체적 한계, 그런 것은 아무도 관심 없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물론 이런 한계와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들의 학대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예방적 차원의 논의에 있어서는 가해자, 어른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도적인 원인 분석을 바탕으로 개인의 한계를 돕는 사회적 보호가 제시돼야 한다. 하지만 학대의 대책으로 더 가혹한 노동과 규칙, 그리고 이해될 수 없는 수치적 제도가 결론으로 주어진다. 아이들의 마음, 부모의 일터와 주머니 사정, 교사의 육체적 한계와 거리가 먼, 어떤 대책들만 숨 가쁘게 계속 발전해 나간다.

Kindergarten(유치원)의 창시자인 프뢰벨은 모든 어린이는 꽃과 같다고 말하며 ‘개화 unfolding’의 개념을 강조했다. 개화란 아이들은 작은 씨앗 같지만,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피워낼 수 있는 꽃의 가능성을 담은 존재들임을 뜻한다. 또 그를 길러내는 ‘정원지기’를 교사의 역할로 보았다. 이는 만개를 위한 적절한 환경을 준비하는 정원지기를 통해 제 꽃이 만발하는 이상적인 영유아 교육환경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꽃과 같은 우리 아이들을 키워나가는 모든 어른들이 지혜로운 정원지기가 되어 사회적 책임을 모색해야 한다. 정원지기 한 명의 부족함과 충동적 상황에 꽃 농사의 모든 결과를 맡기지 말고 너의 밭이 아닌, 우리 밭이 되어 함께 나갈 수 있도록 ‘건강한 정원지기’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성장과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객관적 수치를 뛰어 넘는 심층적인 정원지기의 마음과 건강한 돌보기로부터 시작할 때 정원 가꾸기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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