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6월 7일

마을 뒷산에서 도자기 발굴
온전한 18점, 시가 수천여원

 

 

“진위군(振威郡) 북면(北面) 봉남리(鳳南里) 유정기(柳定基)는 거(去) 칠일(七日)에 봉남리(鳳南里) 뒤 장산(長山)에서 고려기(高麗器)를 발굴(發掘)하였는데, 다수(多數)는 파손(破損)되었고 완전(完全)한 고물(古物) 십팔점(十八點)을 채득(採得)하여 진위경찰서(振威警察署)에 보관(保管)하였는데, 해지(該地) 평가(評價)에 의(依)하면 수천여원(數千餘圓)에 달(達)한다 하나, 전문가(專門家)의 평가(評價)가 아님으로 정확(正確)한 가격(價格)은 아직 알 수 없다더라”(『동아일보』 1924년 6월 18일)

평택의 옛 이름은 많다. 연달부곡, 부산현, 금산현, 송촌활달, 하팔현, 상흘현, 팽성현, 평택현, 진위현 등등.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삼한시대에는 ‘연달부곡’, ‘부산현’ 등으로 불렸다. ‘진위’라는 지명은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정해져 1938년까지 사용했다. 고려시대 진위군은 수주(水州)의 속현(屬縣)이었다. 1914년 평택군을 통합해 진위군으로 불리다가 1938년 평택군이 됐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진위군의 중심지는 평택역 일대로 바뀌었지만 그 이전가지만 해도 진위군의 중심은 봉남리였다. 그런 점에서 봉남리는 평택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위향교를 비롯해 옛 진위군청 등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진위면 봉남리에서 역사적 유물이 발굴됐다. 봉남리는 무봉산을 주봉으로 해 마을 뒤쪽으로 산이 이어지고 있다. 1924년 6월 7일 유정기(柳定基)라는 주민이 어느 곳을 지정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마을 뒤 장산(長山)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발굴했다. 아마도 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도자기는 제법 수량이 많았지만, 발굴과정이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대부분 파손됐다. 그래도 온전하게 보존된 도자기가 18점이었다. 이 고려 도자기는 일단 진위경찰서에 보관하기로 했는데,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고려 도자기의 시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금액으로 ‘수 천여 원’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사료적 가치가 충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에도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평택에 박물관이 없기 때문에 관외로 유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유물은 평택의 역사이지만, 평택에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1924년에 발굴된 고려시대 도자기도 이제는 그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는 것 역시 평택의 자존심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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