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6월 1일

현금 25원 든 지갑을 강탈
평택경찰 범인 평택서 잡아

 

 

“지난 일일 오전 육시 삼십분경 진위군 북면 봉남리(振威郡 北面 鳳南里) 우육행상 길순복(吉順福, 27)에게 어떤 자가 들어와 소를 팔 것이 있으니 현금을 가지고 오라고 한 후, 산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 현금 이십오원이 들어있는 지갑을 강탈하여 가지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는데, 소관 평택(平澤)경찰서에서는 시급히 수색을 개시하여 일일 오후 네시경에 박용재(朴龍在, 27)를 체포하고 취조하였던 바 죄상을 자백하였다라”(『중외일보』 1928년 6월 5일)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마도 소(牛)가 아닌가 한다. 때문에 소는 농촌에서 중요한 재산의 하나였다. 그러나 보니 소는 귀한 동물이었다. 이처럼 소가 귀하다보니 전 근대기에는 소를 함부로 잡은 행위를 범죄로 다뤘다.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 정도였다. 집안 어른 생일쯤 되는 날에야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우육행상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도둑의 표적이 되기도 했는데, 평택에서 절도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 6월 1일 새벽 6시 30분경, 당시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 살고 있는 우육행상 길순복(吉順福)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인물이 찾아왔다. 아마도 길순복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이 낮선 인물은 길순복에게 팔 소가 있느니, 돈을 가지고 오라고 구슬렸다. 혹 했던 길순복이 돈지갑을 가지고 오자, 낮선 인물은 길순복을 끌고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서 돈지갑을 빼앗아 달아났다. 돈지갑에는 거금 25원이 들어 있었다. 길순복은 즉시 평택경찰서에 신고했다. 평택경찰서는 즉시 수색해 오후 4시경 평택에서 절도 범인을 잡았다. 범인은 20대 후반인 박용재였다. 박용재는 절도사건에 대해 순순히 자백을 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요즘도 우육행상 즉 정육점을 운영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시선을 받고 있다. 우육행상은 도살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도살업을 담당하였던 ‘백정’은 근대시기 인권옹호운동 차원에서 형평사를 조직해 신분차별을 철폐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백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평택에는 도살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지 형평사 조직이 두 군데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위와 평택이라는 지명을 각각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자의 인식이겠지만, 1914년 진위군과 평택군이 통합됐지만, 절도사건이 난 1928년에도 진위와 평택은 정서상 통합은 아직 이른 편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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