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사랑으로 어려움 극복한 일본인 효부

 

 
야요이 씨, 임신한 몸으로 2년간 시어머니 병상 지켜 내기도

야요이(여·39) 씨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3년 전 한국인 남편에게 시집을 오면서부터다. 처음에는 낯설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조금씩 묻어나는 일본식 억양이 오히려 다정스럽고 친근하게 들릴 정도로 지금은 한국말이 꽤나 유창하다. 생김새도 우리와 같아 국적을 굳이 묻지 않는다면 한국여성 모습 그대로인 그녀는 시부모님을 한국여성보다 더 잘 섬기는 효부로 소문났다.

시집의 반대 무릅쓰고 국제결혼
1999년 2월,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녀가 헤쳐나가야 할 이국생활의 출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12세나 나이가 더 많은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야만 했던 것.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갈등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시부모님과의 관계가 힘들었다.
띠동갑인 남편은 집안의 장남으로 시부모님은 그들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식은 올렸지만 시댁에서는 일본인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하겠다고 해도 반기지 않을 정도로 냉대를 받았다. 더욱이 한국문화나 언어를 전혀 몰랐던 야요이 씨는 주변의 질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멸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진짜 한국인이 되려는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사랑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자상한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차 생활이 안정돼가면서 둘째 아이 임신으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무렵 야요이 씨에겐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왔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진 것. 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한 시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되어 장기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다. 야요이 씨는 시어머니가 쓰러진 날부터 병상을 지키며 간병에 매달렸다. 일본에서 간호대학을 나온 그녀에게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물론이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거나 떼는 등의 병수발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시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그녀에겐 갈수록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만삭이 됐을 무렵에는 손아래 동서와 번갈아가며 시어머니의 병상을 지켰으나 동서도 임신을 해 두 사람 다 자신의 몸을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동서가 쓰러지고 말아 야요이 씨는 무거운 몸으로 시어머니와 동서까지 두 사람을 간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설성가상 그 와중에 고국에서 날아온 소식은 그녀를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 친정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지만 장례식에 가볼 수 없었던 아픔은 지금도 그녀 가슴 속에 상처로 남아있다.
“그때가 제 인생에 가장 힘든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친정에서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려운 시집 식구들 때문에 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토록 구박했던 일본인 며느리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쓰러진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남편과 함께 홀로 남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간다. 시아버지는 혼자 외로워서 술을 자주 드신다고. 너무 힘들었을 때 도망가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의 말이 따뜻하게 울린다.
“남편의 사랑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어요. 시아버님도 불쌍하고요. 아버님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남편도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해 불쌍하죠.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자녀들, 민간외교관이 되었으면
홀로된 시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으면 함께 모시고 참여하기도 한다. 보람 있게 노후를 보낼 방법을 찾아 권유해드리는 그녀는 요즘 같이 추운 겨울철에는 집에 계시는 날이 많은 시아버지를 위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오후 5시가 되면 반드시 귀가해 밥상을 차려드린다고 했다.
평택시 원평동 주민센터에서 그녀에게 한국요리를 가르치고 있는 김명옥 씨는 “한국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효부가 없어요”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6살과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인 세 자녀의 교육을 위해 김명옥 씨는 성적이 우수한 고교생을 방과후 교사로 소개시켜줘 공부를 돕고 있다고. 그러나 야오이 씨는 자녀들에게 엄마의 모국어는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다.
“시아버님이 일본말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일본에 보내 공부시키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한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함께 갖게 하고 싶어요.”
아직 한국에서는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굳이 자녀들의 국적문제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 속에, 자녀들이 커서 양국을 잘 이해하는 민간 외교관이 되어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가교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기대가 드러난다.

※다문화가족이란?
우리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 북한이탈주민(새터민), 외국인거주자 및 그들의 자녀들을 비차별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