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노동자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비정규직은 내 동네·이웃·부모 이야기”
“평택시,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나서야”

 
“특별하게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상황이 이끄는 대로, 맘이 가라는 데로 하다 보니 벌써 이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었네요”
평택비정규노동센터를 맡고 있는 남정식 소장이 노동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7년 IMF 사태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대학 시절인 89년 야학을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민운동가의 길에 나선 남정수 소장은 지인의 권유로 1996년 평택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가장으로서 의무를 해야 했기에 취업을 했죠.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는 노동운동을 해서 소위 ‘리스트’에 올라 있던 저의 전력을 이유로 해고를 하더군요. 이렇게 취업과 해고의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IMF를 맞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비정규직을 양산해내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보며 남정수 소장은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2007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2008년 출범과 함께 쌍용차 사태가 터졌고 그 중에서도 법적인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본격적인 일들을 시작했죠”
정의감이라던가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살던 동네 내 이웃 내 부모의 이야기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남정수 소장에게 현재의 비정규직 제도는 꼭 바뀌어야할 대상이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에 대한 불이익을 우려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확하고도 명확한 권리마저 주장하지 못하고 대부분 퇴직 후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평상시에는 그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자신에게 일이 생겨 참여해보곤 그 필요성을 아는 것이 노동운동입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자세히 서류를 살펴보지도 못하고 도장을 찍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하는 남정수 소장은 회사가 살아야 직원도 산다는 이상한 논리에 대해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이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회사가 없이는 노동자도 있을 수 없죠. 하지만 그것은 사측과 노동자 측이 균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나 적용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회사가 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것에 지나지 않죠”
누군가는 약한 이들을 대변해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꾸준히 센터를 운영해오고 있는 남정수 소장은 한 아이의 아빠로서 내놓을 것이 없었던 기억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센터 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삶의 수준을 보면 가장이라고 큰소리칠 입장은 전혀 아닙니다. 그로 인한 갈등도 많이 겪었죠. 언제가 아이가 초등학교시절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아빠!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빠 직업을 써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돼?…, 지금은 다 커서 이해를 많이 해주고는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해 줄 말이 없어 무척 맘이 아팠죠”
평택비정규노동센터는 순수하게 민간인들만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일반 노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보내준 돈이기에 그 규모가 넉넉지 않아 사업 확장에 어려움이 많다. “평택에 있는 많은 공장들 대부분은 비정규직들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유명한 제빵공장의 경우 100% 비정규직으로 운영되고 있을 정도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평택시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남정수 소장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억울함을 호소할 기댈 언덕 하나 없는 한 노동자가 이길 가망성이 희박한 피해에 대한 상담을 요청해왔던 당시를 회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변호사를 부르는 것은 꿈도 못 꿨죠. 그래서 스스로 하나하나 해결해나갔습니다. 얼마 전 2심에서 승소하자 그분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역시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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