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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을 쪼개고 포기하며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줘서
이롭게 함이
나눔의 행복이다

 

 
▲ 맹광주 이사
평택시사회복지협의회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말은 서양에나 있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하는 ‘정 情’이 많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콩 한 쪽이라도 나눠 주었다는 우리 선인들의 나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여다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하면 옛 경주 최 부자 집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옛 문헌에 보면 최 부자 집은 영남을 대표하는 만석꾼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12대에 걸쳐 300여년을 부자로 이어간 집안으로 유명했다. 최씨 집안의 가르침은 현대 우리 사회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그 가르침은 ‘육훈 六訓’으로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10000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러한 여섯 가지 가르침에는 나눔의 실천이 담겨있다.

호남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었다. 전남 구례군에 있는 운조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집이다. 이 운조루에는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 뒤주가 있다. 이 뒤주의 마개에는 ‘타인능해 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타인능해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열고 쌀을 가져가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운조루의 주인은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필요한 양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위 두 사례의 공통점으로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함이 있었고 또한 세심한 배려와 아낌없는 나눔의 실천 그리고 사회 환원이라는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다. 앤드류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고 빌게이츠는 “부의 사회 환원은 부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이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가진 것을 사회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부는 사회로부터 다른 사람과 공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므로 다시 사회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결국 가난도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외국의 사례도 있다. 1930년 뉴욕의 어느 한 법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상점에서 빵을 훔친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에게 판사는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노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도시에 사는 모든 이에게 책임을 물어 판사인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과 방청객들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 중 벌금을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는 노인에게 돌려줘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 라는 분의 판사 시절 이야기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오늘 우리 사회가 봉건시대처럼 신분과 계급이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의 오블리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요즘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한 우리 선인들과 앤드류 카네기, 빌게이츠,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더욱 생각난다.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다.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오블리주를 우리는 실천하고 있느냐고, 좀 더 많이 가진 사람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배불리 먹고 난 후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지만 내 것을 쪼개고 포기하며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줘서 이롭게 함이 ‘나눔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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