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내 인생의 모든 것”

문화, 시민의 삶을 풍족케 하는 수단
끼 있는 아이들, 평택의 소중한 자산

 
“입시 공부를 위해 들어간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형님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그 형님이 그러더군요. ‘이번에도 떨어지면 다 그만두고 영화배우나 하련다’ 정말 그저 스쳐지나가듯 들은 그 말 한마디가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저를 연극계로 이끌었죠”
4수 끝에 들어간 대학을 3개월 만에 뒤로 하고 명장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전문학교로 옮긴 덕분에 유달리 엄한 집안에서 내 논 자식이 되어버렸다며 허허 웃는 정운봉 한국연극협회 평택지부장의 얼굴에 40년 외길을 걸어온 연극인의 원숙함이 묻어난다.
“군 입대 소식을 전하러 가서야 집에 영화로 진로를 바꾼 것을 이야기했죠. 그만큼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100명 중에 한 사람도 살아남기 힘든 당시 영화계의 실상을 알고 나니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너 달을 눈물 반 한숨 반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해보자는 결심을 한 정운봉 지부장은 학창시절을 온통 연극배우로서의 길에 매진한 끝에 1972년 극단 ‘한강’의 단역배우로 연극계에 데뷔하게 된다.
1975년 극단 실험극장 개관기념으로 무대에 올린 ‘에쿠우스’는 팬들에게 연극인 정운봉을 각인시켰다.
“제법 명성을 얻고 나니 나만의 극단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경영이 어렵던 극단 하나를 친구들과 함께 인수했는데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올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죠”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정운봉 지부장은 1983년 극단 민중에 들어가 대중, 광장과 합동 공연으로 초연한 ‘아가씨와 건달들’에 암흑가 보스 빅줄 역을 맡아 전국적인 지명도를 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에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호평을 받은 ‘아가씨와 건달들’의 유명세를 타고 1990년 까지 극단 ‘민중’에서 활약한 정운봉 지부장은 1991년 또다시 극단 ‘예보’를 창립했으나 한편을 끝으로 다시금 문을 닫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주저앉을 수 없었죠. 그래서 다시 1992년 최종원, 전무송 등과 함께 ‘극발전연구회’를 설립 1993년 첫 작품으로 ‘북어대가리’를 무대에 올렸죠. 성좌소극장에서 초연된 ‘북어대가리’는 당시 대단한 흥행을 거둬 지방순회공연은 물론 해외공연까지 할 정도로 큰 성공을 했고 그해 백상예술대상 대상, 작품상, 연출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제 연극 인생의 절정기였죠”
1996년 수원에 내려온 정운봉 지부장은 소극장을 차려 자신만의 극단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나갔으나 당시 찾아온 IMF 사태는 연극계에도 한파를 불러와 3년 만에 다시금 꿈을 접고 1991년 창립 멤버로 잠시 몸을 담았던 ‘경기도립극단’에 들어가 2008년 그만둘 때까지 예술 감독 등 주요 역할을 맡아 경기도 연극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경기도 31개 시·군 중 연극지부가 없는 곳은 불과 5~6개 시·군에 불과합니다. 특히 대도시급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에서는 평택만이 유일하게 연극지부가 없더군요. 한 도시가 시민의 삶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문화죠. 제가 가진 40년 연극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맘으로 평택에 내려왔습니다”
정운봉 지부장의 이러한 노력은 2011년 6월 평택에서 활동하고 있는 15명의 연극인들과 함께 한국연극협회 평택지부 설립으로 결실을 맺어 평택예총의 여덟 번째 지부로 자리 잡게 됐다.
“첫 작품은 평택과 관련 있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살피고 조사한 결과 무동을 소재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릴 결심을 하고 현재 대본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얼마전만 해도 고등학교에 연극부가 흔했으나 요즘은 입시 위주의 교육 탓인지 하나 둘 사라져 간다며 안타까움을 표한 정운봉 지부장은 평택에서 새 꿈을 키우고자 한다.
“연극이나 영화에 대한 꿈을 가진 아이들이 없을 수 없는데 현재 평택에는 연극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한 곳도 없어요. 끼가 있는 아이들을 평택의 소중한 자산으로 키워주는 것도 기성세대의 역할이죠. 가능하다면 청소년 예술기반이 되는 연극부도 2~3개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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