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 앞바다에 우뚝 선 신비한 ‘영웅바위’
오랜 전설과 서민의 애환을 안고 평택 앞바다를 지키다

▲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 앞바다에 위치한 영웅바위
평택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서해대교를 건너다보면 오른편으로 평택항 서부두 방파제 끝 부분에 범상치 않은 바위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가 바로 영웅바위다. 포승면 만호리에 위치한 이 바위는 만호리 서쪽 약 3km 지점 해상에 우뚝 솟아 있어 밀물 시에는 바위의 윗부분만 약간 나타나지만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낮아지면 높이 15m, 밑 둘레 60m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어부들의 지표였던 ‘영웅바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의 옛 지명인 ‘대진(大津)’은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해안 포구였다. ‘솔개바위나루’라고도 불렸으며 신전포와 계두진, 원정리 한나루, 홍원리 호구포, 삼개리 옹포와 함께 평택의 중심이 되는 항구였다.
대진포구 외야곶면 바다 가운데 있는 ‘영웅바위’는 예부터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신비한 바위로 알려져 있었으며 평택사람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각광을 받아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진은 수원부 서남쪽으로 1백리이며 넓이가 10여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영옹암(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 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영웅바위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멀리서 보면 중앙에 돛대 모양의 길쭉한 바위가 솟아있고 그 주변엔 낮은 바위들이 울퉁불퉁하게 일어나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치 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택은 나루와 포구가 발달한 고장으로 그중에서도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대당교역 및 당진, 면천, 서산, 태안 등 경기만 일대의 여러 고을과 교역했던 나루이자 조선왕조실록에 수 없이 거론되는 군항(軍港)이기 때문이다.
신라말 고려초를 거치며 쇠퇴했던 대진이 역사적으로 다시 부각된 것은 고려 말 왜구가 침입하면서였다. 수 십 또는 수 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해안에서부터 내륙 깊숙이까지 노략질을 했던 왜구들은 팽성읍의 하양창을 점거하기 위해 아산만 일대를 집중 공략했다. 왜구의 공격으로 서평택지역의 용성현(안중읍), 광덕현(현덕면), 경양현(팽성읍 서부지역), 평택현(팽성읍 동부지역)은 폐허가 됐고 백성들은 보따리를 이고 피난을 떠났다. 만호리 앞바다에 우뚝 솟은 영옹암에 영웅바위 전설이 전해지게 된 것이라든가, 만호리에 황장군 전설이 전해오는 것도 왜구의 침입, 청일전쟁 같은 외적의 침입에 기인한다. 
이 나루 부근은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지만 바다 쪽으로 열려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는 당진이나 서산 사람들이 이곳으로 드나들기도 했고 안중장에서 소를 사서 대규모 선단을 이뤄 떠났던 곳도 이곳이었다. 어부들은 영웅바위를 지표삼아 배를 몰았고 이곳을 지나는 이들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존재도 영웅바위였다.
예로부터 이 부근은 물고기가 지천이었으며 바다가 낮고 잔잔한데다 진위·안성·삽교천 하구로 최적의 산란지였다. 어부들은 삼중망, 꽃게그물, 장대그물, 낭장과 같은 어구를 이용해 알이 꽉찬 강다리, 숭어, 꽃게, 넙치를 잡았으며 산란기에 잡은 살진 강다리는 거저 주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 대나무 낚시에 걸려드는 망둥이조차 씨알이 굵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시절이기도 했다. 영웅바위 인근에 있는 포승읍 원정리 멍거니 부근에서는 1949년 3월, 배를 타고 조개잡이를 나갔던 마을주민 80여 명이 돌풍으로 배가 부서지고 갯벌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바다에 수장(水葬)된 사건도 있어 포승읍 서부 해안마을에서는 지금도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이런 천혜의 자원 속에서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있던 영웅바위는 뱃길로 드나들던 주민들에게는 애환이 서린 곳이었으며 썰물이 되면 잠시 앉아 쉬기도 하는 평택시민들의 역사를 간직한 나들이 장소이기도 했다.

▲ 영웅바위로 놀이를 간 포승 주민들

평택을 수호하던 영웅바위의 전설

조선후기 만호리 앞 바다의 영웅바위는 ‘영옹암’으로 불렸는데 영웅바위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이 부근으로 침입할 때 바위가 신통력을 발휘해 마치 수군(水軍)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변했고 주변의 작은 바위들도 군졸로 보이게 했다고 한다. 이곳에 당도했던 왜군들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형상에 속아 대경실색하며 도망을 쳤다고 전해지는데 그 뒤 조정에서도 바위의 공을 높이 평가해 바위이름을 ‘영웅바위’라고 칭하도록 하고 정3품의 ‘옥관자’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청일전쟁 때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 바위를 멀리서 보면 그 형상이 마치 군함이 떠 있는 것 같아 일본 함대가 이곳으로 진입하다가 이를 군함으로 잘못 알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函)과 관련이 있는 전설이다.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당시 영웅바위는 부유한 과부댁의 장독대였고 영웅바위는 육지에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지함이 바위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 바위에 피가 묻게 되면 지진이 일어나고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이지함의 말을 흘려들었고 점차 잊어갔다. 그러던 중 마을 주막에서 돼지를 잡다가 돼지 피가 바위에 묻었고 옛 말을 기억했던 한 사람만이 마을을 떠나 높은 곳으로 피신했다. 몇 시간 후 과연 예언처럼 천둥이 치고 땅이 갈라지더니 바닷물이 차올라 마을이 물에 잠겼고 오직 영웅바위만이 물 밖으로 솟아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전설로 토정 선생이 영웅바위 주변에 지진이 일어나 바다로 변할 것을 미리 알고 주민들에게 피신을 권고했으나 함께 있던 소금장수만이 높은 산으로 피하다가 산 중턱에서 멈춰있어 산꼭대기로 올라오라는 선생의 다그침에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과연 예언대로 땅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잠겼는데 바닷물이 소금장수가 있는 바로 앞까지 와서 멈추어서 이지함 선생이 소금장수의 신통력에 탄복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하나의 전설로는 원래 이 바위는 사대부가의 정원에 있다가 해일로 인해 포승읍 만호리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해동여지도 수원부(1735년) - 하단 중앙부 영웅바위
평택의 역사와 함께 한 ‘영웅바위’
현재 영웅바위는 평택항 경계분쟁으로 인해 충청남도에 속해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대부분의 기록이 현재의 평택시와 관련이 있는 수원도호부, 양성현, 직산현의 읍지 및 지리지에 수록된 점이나 1801년 심상규가 편집한 정조대왕의 문집 홍재전서의 기록도 영웅바위와 관련해 소유권 문제를 실증할 수 있는 사료로 남아있어 역사적 뿌리를 짐작케 한다. 홍재전서 제27권 잡저4에 보면 1789년 원침(園寢-사도세자의 능)을 옮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룡(來龍)이 광교산을 조산으로 하여 사근현(沙斤峴)의 큰 계곡을 지나 장막을 열고 중심을 뚫은 듯 용절마다 법에 합치되고…(중략) 내당의 물은 생기방(生氣方)에서 근원하여 파문(破門)으로 흘러 근원으로 돌아가며, 앞뒤의 명당에는 만 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이고, 재신 격인 영옹암(令翁巖)은 외수가 서로 만나는 곳에 진압하고 있으니…” 이것은 현륭원(융릉)을 옮기면서 주변의 풍수에 대해 논한 것인데 영웅바위는 재신(宰臣)에 해당하는 곳으로 외침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풍수적으로도 수원의 광교산이나 팔달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영역이 수원도호부의 영향아래 있었던 포승읍을 비롯한 서평택지역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다양한 사료들도 물론이지만 당시 인근에 살았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영웅바위 이야기는 평택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만큼 단지 행정구역이라는 이유로 쉽게 간과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1974년 평택호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이 주변의 풍족했던 어족자원이 크게 고갈되고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외지인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하더라도 그 지역의 역사와 뿌리는 바뀌지 않으며 오히려 튼튼한 뿌리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야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21세기를 바라보는 현재에도  여전히 평택의 역사를 간직하고 만호리 앞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영웅바위는 전설만큼이나 평택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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