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4월 29일

진청학원 운영 기초 확립 목표
회장 정인창, 평의원 15명 선출

 

 

“평택 진청학원은 거금 10여년 전부터 현 도회의원 함풍민훤씨가 학령 아동이 배우고자 하나 교육기관의 수용력이 부족하여 문맹퇴치 못함을 유감하고 단독으로 경영하여 오던 중 현재는 아동이 7백 여명이고 제반 시설과 내용이 국민학교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데 학부형들은 더욱 기 기초를 확립시키고자 지난 29일 동원 대강당에서 학부형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선 역원은 여좌하다.

회장 복영인창, 부회장 청산민천, 궁본진훈, 회계역 류촌기옥, 감사 안병철 청송인구, 평의원 방한영 외 15人, 고문 적성성렬 령천응구 화산병렬 평원경수 민병후 안전봉수 시야균 대산용준 광영종완”(『매일신보』 1942년 5월 6일)

해방 이전 ‘진청학원’에 대한 설명 중 하나가 ‘당지에서 유일한 무산아동의 문맹퇴치 교육기관’이다. 여기서 당지當地는 물론 ‘평택’이다. 평택지역에 많은 교육기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청학원이 무산아동의 교육기관으로 상징됐다. 그만큼 진청학원이 평택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리라.

진청학원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1928년 설립 당시에는 서울로 유학을 하던 중학생 2, 3명이 중심이 됐다. 너무 열심히 무산아동을 위해 가르치느라고 강사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진위청년회의 후원과 운영으로 한동안은 어려움이 없었지만, 늘 운영비가 부족했다. 학생들이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푼푼이 모은 돈을 기부한 노동자와 기생의 미담도 있었다. 1933년 일시 폐교됐지만 1935년 지역유지인 이민훤이 인수해 명맥이 유지됐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는 ‘학부모회’가 있다. 학부모회는 ‘가정과 학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학생의 효과적으로 지도·교육하기 위해 조직된 학부모의 모임’을 일컫는다. 지금은 학부모회이지만 예전에는 ‘학부형회’라고 칭했다. 당시 학부형회는 지금처럼 학생 지도와 교육보다는 학교 운영에 중점을 뒀다. 이는 학교의 경영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진청학원도 1942년 4월 29일 학부형회를 창립했다. 목적은 당연히 ‘진청학원의 기초 확립’ 즉 안정적인 경영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청학원은 설립 이후 경영에 어려운 고비가 많았다. 때문에 정상적인 경영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를 위해 지역유지를 중심으로 학부형회가 조직됐다. 회장에는 진위청년회 위원장을 역임한 정인창이 선임됐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복영인창福永寅昌’으로 돼 있는데, 이는 창씨한 이름이다. 부회장과 감사, 평의원 등도 당시 이름을 보면 대부분 창씨를 했다. ‘적성성렬赤城成烈’응 이성렬, ‘평원경수平原慶秀’는 황경수임을 알 수 있다. 진청학원장인 이민훤의 창씨명은 ‘함풍민훤咸豐敏煊’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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