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8월 3일

생활고 시달리다 영아 버려
되찾으러 갔다 경찰에 잡혀

 

“진위군 고덕면 동고리(振威郡 古德面 東古里) 농업 김학모(金學模)의 처 민덕준(閔德俊, 29)이란 여자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전기 김학모와 결혼생활을 하여오던 바,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빈한한 가정에 어린 것을 데리고 생활난에 쪼들렸는데, 그 남편 되는 김학모는 조금도 가정을 돌보지 않고 항상 주색(酒色)에 침혹하여 생활난은 갈수록 심하여 할 수 없이 출생한 지 一개년 되는 三남을 업고 집을 나와 차츰차츰 수원까지 와서 살 길을 찾아보았으나 그 역 마음대로 되지 않고 살아나갈 길이 점점 막연함으로 최후로는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악독한 마음이 생겨 천진난만한 그 핏덩어리의 애지중지하던 자식까지도 돌볼 여지가 없음으로 (중략) 그리하여 수원서에서는 영아유기죄(嬰兒遺棄罪)로 엄중한 취조를 진행 중인 바, 지은 죄는 법률상 어찌 할 수 없으나 그 여자의 정상을 들은 취조를 진행하던 경관으로서도 동정(同情)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매일신보』 1937년 8월 10일)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 너머로 달아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난은 삶을 힘들게 한다. 생활고가 계속되면 인간으로서 해서 안 되는 가슴 아픈 일도 종종 일어난다. 1930년대 중반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반 민중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영아를 유기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는데, 평택에서 심금을 울리는 일이 일어났다.

고덕면 동고리에 사는 29세의 민덕준은 결혼생활 13년 동안 자식 셋을 두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주색에 빠져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생활고가 심해지자 민덕준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후 1년 된 아이를 안고 집을 나와 수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더는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아이를 수원 화장장이 있는 매산동 산속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아이는 김유성이라는 사람에게 발견됐고, 양육까지 맡았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는 눈물로 몇 날을 지내다가 다시 아이를 찾으려고 갔다. 아이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하늘을 원망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를 발견한 경관에게 체포된 어머니는 영아유기죄로 취조를 받았다. 취조 중이던 경관은 자초지종 그 사연을 듣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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