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들의
비통한 마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 임윤경 사무국장
평택평화센터

기업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해고입니다. 기업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사람들의 영혼이 좌지우지되지요. 해고를 뜻하는 영어 ‘fired’는 ‘총을 맞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우리말의 해고와 정서적으로 똑같습니다. 우리는 해고를 표현할 때 대부분 손으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잖아요. 우리에게 해고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마치 죽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해고는 살인’입니다. 해고는 노동자의 삶을 그 뿌리까지 박살 내고 그의 가족까지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쌍용자동차 30번째 죽음. 고 김주중 조합원을 추모하는 대한문 분향소에도 이슬과 함께 가을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처구니없이 잃은 이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물리적인 시간을 통해서 ‘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분향소의 가을이 조합원들에게는 더욱 차갑고 서글프게 다가옵니다.

어느 날, 분향소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그날 지킴이였던 조합원 한 분이 내게 던진 질문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모두 복직이 되면 이 싸움이 끝이라고 생각하세요?” 불현듯 던져진 질문에 전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죠. ‘복직되면 이 싸움이 끝난 것’아닌가, 그럼 무엇이 더 남은 걸까.

그 조합원은 해고 9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냈습니다.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니며 번번이 떨어졌던 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못 본 척 참아야 했던 일, 해고자라고 차별을 경험했던 일, 그러다 사람들이 싫어졌고 그 응어리가 가족에게 모조리 분노로 쏟아졌던 일, 그 일로 딸아이들이 자신을 피하게 됐다는 먹먹한 이야기까지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해고자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과 슬픔은 눈에 보이는 터널처럼 분명한 ‘끝’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내야 하는 응어리며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상처는 너무나 깊고 아파서 복직된다고 해도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복직이 된다고 해도 이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일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야 할 일상이 모두 깨졌기 때문이에요. 깨어진 일상은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이 온몸으로 겪어내며 견디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없이 반복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해고는 살인’입니다.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진정 해고는 살인입니다.

얼마 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이런 해고를 받아들일 수 있나요: 쌍용차 해고자-배우자 실태조사 발표’가 있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을 위한 건강상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발표장에서 가족대책위 한 분이 울분을 터뜨리며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남편이 쌍용자동차 입사 7년 차였던 2009년 해고 당시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그 아이가 열 살이 됐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해고가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어도 될 일들, 상처, 기억은 누가 보상해 줍니까”

어떤 작가는 말합니다. “비통함으로 마음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 자들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이들의 “비통한 마음이 복합성과 모순을 끌어안을 위대한 능력으로 깨져서 열린다”고, 그 결과 비통함은 ‘새로운 삶’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말이죠.

119명의 해고 노동자들의 비통한 마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각자의 다른 손이 내 손을 꼭 잡아주듯 따뜻하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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