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올해도 마지막 한 달이 남았다. 여러 계획들을 품고 시작한 한 해가 끝나간다. 계획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많은 의미 있는 약속들은 무산되었다. 잿빛 하늘 아래서 맞는 한 해의 끝자락, 아무 감회가 없을 수 없다. 봄비 속에서 꽃봉오리를 활짝 연 모란과 작약들을 보며 감동을 느꼈다. 여름에는 수박 몇 통을 깨먹으며 더위를 견디고, 냉면 몇 그릇을 먹으며 폭염과 열대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덜어냈다. 노모가 큰 수술을 받고, 두 아이가 미국 영주권을 받아 떠났다. 유난히도 단풍색이 고왔던 올 가을은 빠르게 지나갔다. 올해도 나는 많은 책들을 사 읽고, 먼 길 산책하며 지나왔다. 신문과 잡지에 부지런히 글을 쓰고, 여러 대학과 도서관과 기업들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여러 방송에 나가 책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무엇보다도 시집과 인문학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펴냈다. 올해는 곧 지나갈 것이고,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지나간 것들은 감미로워진다. 먼 뒷날 내가 늙어 백발이 성성해진 뒤에 난롯가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올해의 어느 순간들을 추억으로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때 사랑과 기쁨의 날들이 내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그리고 그 발랄하고 우아했던 찰나들이 얼마나 빠르게 사라져버렸는지를!

12월에는 폭설과 혹한의 날들이 이어지겠지. 12월 31일에는 어김없이 종로의 보신각에서 종을 치는 제야의 축제가 있겠지 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누구인가라고 조용히 묻겠지. 철학자들은 ‘나’를 ‘의미 있는 실재’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람이다. 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다. 육안으로는 거의 완벽한 좌우대칭형의 외관을 가진 이 포유류는 불을 다룰 줄 알고, 선과 악을 구분하고, 화가 날 때는 공격을 하고, 두려울 때는 도망가고, 선택과 분류에 뛰어나고, 평생을 오른손잡이로 살고(왼손잡이들도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남 험담하기를 즐기고, 거짓말을 중요한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쓰고, 추측을 통한 추론에도 능란하다. 이들은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부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시, 음악, 동화를 짓고 그것을 즐기며, 헐벗고 아픈 사람들을 자신의 것들을 기꺼이 덜어서 돕는다. 사람은 착한가 하면 악하고, 악한가 하면 착하다. 사람은 비열하면서도 숭고하고, 숭고하면서도 비열하다.

나는
종 속의 혀
무겁고
침묵하는
혀.

나를 건드리지 말라―
쇠 옆구리를 찌르는
내 몸짓으로
침묵을
부수게 만들지 말라.

종이 흔들리기 시작할
그때에야
나 또한 치고
흔들고
다시 칠 것이다

깊은 쇳덩이를.

하우게(1898~1994), <추와 종> (하우게 시선집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실천문학사, 2008).

사람으로서 나는 의미를 향하여 있는, 혹은 의미를 만드는 실재다. 산다는 것은 실재로서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노르웨이의 국민시인 하우게에 따르면 ‘나’는 종속에 있는 ‘추’다. 나는 종속에 있고, 추는 종속에서 매달려 침묵하는 혀다. 나는 혀다. 나는 혀로써 말하고, 먹고,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 혀는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내 갈비뼈 아래에서 당신은 내 혀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을 받아먹고 산다. 혹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혀가 말할 때마다 당신은 굶고 수척해져서 죽는다. 말하고 먹고 사랑하는 혀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다. 그게 ‘영(靈)’이고, ‘유현(幽玄)’이다. 혀는 혼자 말하지 않고, 혼자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과 유현의 부림을 받는다. 혀는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 흔들리고 추가 쇳덩이를 친다. 침묵하던 혀가 말한다. 그 소리가 만방으로 울렸겠다. 멀리 퍼지는 소리는 잘게 쪼개지는 종의 분신이다. 어디에 있든지 그 소리를 들으며 종을 생각한다. 물론 소리는 혀의 소리가 아니다. 울려 퍼지는 소리는 영의 영이고, 유현의 유현이다. 무거운 쇳덩이가 쇳덩이를 벗어나 소리로써 제 존재를 계시하는 것! 초탈의 찰나! 언젠가 나도 나를 넘어서는 저 초탈의 찰나를 갖게 되리라.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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