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2월 2일

국유소작인 중심 결성
관변단체 성향이 강해

 

 

“진위군 병파여방면의 국유國有 소작인조합小作人組合 창립회를 거 이일에 개설하였다는데, 기시 상황을 상문詳聞한 즉 겸하여 농산품평회農産品評會까지 개설한지라. 출품수는 삼배구십칠점인데, 일등 급 이등인에게 대하여 농기를 상여賞與하고 기외 오명에게는 포상장을 급여하였고, 조합장의 개회사, 이사의 보고, 경기도 앵정櫻井 재무부장관의 근검저축勤儉貯蓄의 훈시, 해군수의 고유, 수원권업모범장 향판(向坂) 기사의 농업발달적 연설, 해군 공립보통학교장 암좌미차랑岩佐米次郞의 농업교육상의 설명, 흥농사 주간 전현의씨는 농업개량적 연설, 우편국장은 저축편리방법으로 설명하였다는데, 당일 성황을 정하였다더라”(『매일신보』 1911년 12월 5일)

‘소작인小作人’이란 의미는 남의 땅을 빌어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짓는 사람을 뜻한다. 농민들이 자신의 땅 없는 경우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작료가 적지 않기 때문에 소작농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했다. 이른바 경세치용을 강조했던 실학자들도 자영농 육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소작농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상조회相助會라는 조직을 만들기도 했는데, 1911년 12월 2일 평택에서도 소작인상조회가 조직됐다. 당시는 진위군이었기 때문에 ‘진위소작인상조회’라고 했다.

진위소작인상조회는 병파면과 여방면의 국유지를 이용해 경작하던 소작인이 중심이었는데, 식민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상조회를 창립한 12월 2일 당일에 참석한 주요 인물인 경기도 재무국장, 수원 권업모범장 기사, 일본인 보통학교 교장 등이 참석했다는 점에서 관변단체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소작농을 이용해 식민통치를 원활히 위한 방편이었다. 여하튼 상조회를 창립할 때 참석한 주요 인물은 근검절약을 강조했고, 농사 개량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창립일에 농산물 품평회도 곁들였는데, 출품 수가 397점이었고, 수상자들에게는 농기구를 부상으로 전달했다.

이처럼 소작인을 이용해 친일을 한 인물로 송병준宋秉畯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알려진 송병준은 1921년 8월 27일 친일파 20여 명을 모아 조선소작인상조회를 결성했고, 지방에도 지부를 설치해 활동했지만 1930년대 들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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