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을 먹으며

가끔 자장면(炸醬麵)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처음 이 색다른 음식을 먹었을 때 두개골에 우레가 치는 듯 강렬했던 미각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장면 : 빛과 그늘의 이중주. 돼지고기와 함께 볶은 춘장의 그 고소한 맛, 아삭아삭 씹히는 양배추와 양파, 쫄깃한 면발…… 자장면은 어떤 음식보다 더 감칠맛이 있었다.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던 문학청년은 그 뒤로 자주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서리는 꽃이 되고,/이슬은 별이 되는”(실비아 플라스) 날이 저 멀리에서 반짝거린다고 믿던 시절이다. 자장면을 먹을 때 이상하게 이틀 전에 실연당한 철도원 같이 조금은 슬퍼진다.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지금도 날이 궂을 때는 느닷없이 중화반점에 나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진다. 자장면을 볼이 미어지도록 물고 씹을 때 왠지 묽은 슬픔이 가슴을 채우곤 한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시립도서관이나 음악감상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고전음악에 빠져 자주 서울 명동에 있던 음악감상실에 나갔는데, 입장료를 내면 점심값이 없어 굶는 게 예사였다. 어쩌다가 돈이 생긴 날에나 점심끼니를 먹을 수 있었다. 점심 끼니를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지만, 자장면 한 그릇을 먹고 난 뒤의 황홀한 포만감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 시절 나는 무명인(無名人)이었고, 자장면은 무명인에게 맞춤한 끼니였다. 그 무명인은 자장면을 씹으며, 살자, 그래 열심히 살아보자고 결의를 하곤 했다.

나는 스물세 살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첫 아들을 얻었다. 나는 문단 말석에 막 이름을 올린 시인이었지만 여전히 사글셋방을 면치 못하는 가난한 시절이다. 나는 직장도 없이 날마다 시립도서관에 나가 앉아 책을 읽었다. 굶주린 매가 새를 잡아채는 맹렬한 기세로 시립도서관 서가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슴 한 구석에 없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가난의 시름을 잊었다. 아이가 자란 뒤 어쩌다가 작은 원고료라도 손에 쥐는 날이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중화반점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아이가 입가에 춘장을 묻히며 자장면을 먹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열심히 살아보자고 젊은 가장은 혼자 다짐을 하곤 했다. 몇 해 전 우연히 방송에 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꼭 내 이야기를 누군가 하는 것만 같아 가사에 귀를 기울였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언제나 혼자서 끊여 먹었던 라면/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어/그러자 어머님은 마지못해 꺼내신/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하지만 어머니는 왠지 드시질 않았어/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지오디 노래, ‘어머님께’) 아, 가난의 풍경이란 다 엇비슷한 것이구나. 자장면이 싫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새빨간 거짓말이라니! 내 어린 시절도 저와 비슷했다. 우리 오남매는 늘 배가 고팠다. 별식에 달려들어 아귀처럼 먹어대는 오남매를 더 먹이시려고 어머니는 늘 입맛이 없다고 뒷전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어머니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제 배 채우기에만 허겁지겁 바빴다. 그 오남매는 제 가정을 꾸려 뿔뿔이 흩어지고 곱던 어머니는 팔순 노인이 되셨다.
한 시인이 그려내는 자장면이 있는 풍경을 보라.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짜장면을 앞에 놓고/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마치 만학도 동생을 둔 형 같다는 부질없는 공상에 빠진다. 가난한 신혼 시절 열댓 번쯤 셋방을 옮기며 이삿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사를 도운 친구들과 함께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자장면을 먹었다. 나는 금방 배가 부르는 자장면을 먹으며 나이를 한 살씩 더 먹고 조금씩 철이 들어갔다. 나는 자장면을 먹을 때마다 분명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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